남정일 前 한국전력공사 전력연구원 원장
1983년 전력연구원 초대본부장으로 취임한 前 남정일 원장에게서 현재와 미래를 잇는 ‘과거’를 만날 수 있으리라. 1958년 조선전업(朝鮮電業, 한전의 전신)에 입사해 만 36년간 전력업에 종사한 남정일 원장에게 ‘전기인의 삶’에 대해 물었다.
편집자주 : 일제는 1943년 조선전력관리령을 통해 조선전업(朝鮮電業)을 창설하였으며, 광복 후 1961년 한국전력의 발전부로 경성전기, 남선전기와 통합되었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간략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1958년도부터 1994년까지 근무하며, 전력연구원 원장으로 퇴직한 남정일입니다. 4월 1일 입사해 3월 31일 근무를 마쳤으니 말 그대로 ‘만 36년’ 근무한 셈이네요. 퇴사한 후에도 장영식 사장님 시절 자문위원으로 잠시 활동하긴 했으나, 최근에는 건강이 다소 좋지 않아 몸조리에 신경쓰고 있습니다.
‘35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을 한 분야에서 종사하셨는데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전력의 길’을 선택하셨는지요?
유년기 : 옛날 얘기라 재밌을지 모르겠습니다만 36년이란 시간 동안 전기인으로 살아온 어느 노인네의 경험담이다 생각하고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장단면(개성)이란 작은 마을의 8남매 중 막내였습니다. 시골마을이였지만, 당시 서울 수색에서부터 문산을 거쳐 장단까지 송전선이 설치되어 있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자랑같지만 동네에서 공부도 제법 잘했고, 철도청에 근무하던 형님 덕분에 경쟁이 치열하던 철도학교(현재의 한국철도학교에 해당)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간신히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1951년 3월에 학교가 재개교한 덕분에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철도학교부터 서울대까지 : 당시 철도학교는 남한은 물론 북한에서 내려온 당대 최고의 기술진이 교육을 담당했습니다. 평양 김일성 대학이나 비료공장 출신이 대거 임용된 데다가 학비 등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감사한 일이였습니다. 북에서 피난을온지라 부두나 담배공장 등에서 일을 하는 등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철도청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등 공부만큼은 비교적 좋은 환경에서 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서울대 전기공학과와 연세대 세브란스 의과대학에 동시 합격할 수 있었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서울대에 입학하면서 전기공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게되었습니다. 조선전업부터 한전까지 : 대학을 마치면 당연히 철도청에 입사할 줄 알았습니다다. 하지만, 당시 철도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공부 못지 않게 인맥이나 뇌물도 필요했습니다. 우수한 성적으로 학업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입사가 어려워 군대를 먼저 갔고 전역 후에도 마찬가지로 철도청 입사가 영 어렵더군요. 마침 조선전업에 공고가 나 전공을 살려 입사, 청평수력을 시작으로 한전에서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조선전업을 아시는 분들도 드물겠습니다만, 당시만 해도 경성전기, 남선전기보다 조선전업을 더 낫게 쳐주었어요.
1983년 전력연구원 초대본부장에 취임하셨는데, 당시 전력연구원의 역할과 목표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전력연구원은 단순히 연구실에서 기술만 개발하는 기관이 아니라, 한전과 정부가 시행하는 전력사업의 실무에 ‘실질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하나의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열심히 공부하는 것 외에도 다양한 분야와의 소통과 내부적인 협업이 필요하지요. 글로벌시대 한국전력연구원의 임직원의 책임이 더 커지고 있는만큼 모쪼록 국민에게 사랑받는 기술을 적극 개발하기를 멀리서나마 응원합니다.
취임하신 후 큰 상을 두 번 받으셨는데요, 구체적으로 소개해 주신다면?
상이라는게 제가 잘해서 받았다기 보다는 함께 한 동료들의 도움과 운이 많이 따랐기에 가능했습니다. 기획부 전원개발과장일 때 전원개발계획을 통해 전력의 공급력을 대폭 향상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철탑산업훈장(1985년 4월10일)과, 30년간 근무했다고 한전 청훈상(1988년 12월 31일)을 하나 받았습니다. 제가 일할 당시만 해도 전기보다 석유, 석탄이나 수력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습니다만 현재 전력의 역할과 중요성이 커진 것만으로도 보람을 느낍니다.
적지 않은 공로를 세우셨습니다만, 가장 후회되는 일 한가지만 꼽으신다면?
아이구, 셀 수도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크고 작은 시도를 아끼지 않았지만, 개인의 역량상 혹은 여건상 ‘꾸준하게’ 추진한 건 생각보다 적었지 않나 싶습니다. 전력산업의 특성상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얽혀 있기 마련인데, 특히 외부적인 구조조정과 투자의 위축 등으로 인해 자체적인 역량을 다 발휘하지 못한 점이 가장 아쉽더군요. 아마 지금 후배들은 고려해야할 요인이 그때보다 더욱 많을 텐데, 당시 함께 학업을 마친 동기들이나 저는 그래도 수월하게 일을 하지 않았나 싶네요.
전력분야의 원로이자 선배로서 동료와 후배들에게 한말씀 해주신다면?
근무하는 기간 동안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은퇴하고 돌이켜 보니 몇가지 아쉬운 점이 있어 한 말씀 드려볼까 합니다. 먼저 전기사에 대한 정립이 필요합니다. 대한민국의 전기사(史)가 100년이 넘었습니다만, 초기 반백년은 일제에 의한 타율적인 개발과 경영으로 스스로에 대한 발전이 부족했습니다. 이를 극복한 후반 50년 우리가 이루어낸 성과와 성취를 앞으로의 백년간 더 발전시킬 수 있도록 ‘우리의 전기사에 대한 이념과 철학 등을 정립’할 시기가 아닌가 합니다. 두번째로 에너지산업의 끊임없는 화두입니다만 전력을 더 효율적으로 최적화하고, 시스템화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정부의 공기업 지방화 전략이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면, 여기에 맞게 어떻게 현지에 적응하고, 최적화할 것인지 현장에서 부딪쳐야 하는 것이 현세대의 과제입니다. 우수한 인재발굴과 개발도 빼놓을 수 없겠네요. 끝으로 역시 통일과 동북아를 통한 글로벌 전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실무자라도 하나같이 쉬운 문제가 없네요. 이미 은퇴한 원로가 두서없이 하는 말이니 너그러이 받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뜨거운 여름철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모든 분들게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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