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액등을 아시나요? 전력이 충분하지 않았던 1960년대의 전력 요금제로 ‘정해진 개수의 등’만을 켤 수 있던 시대상의 한 단면이 아닐까 합니다. 개수를 확인하는 천용반이 가택을 수색하기도 했던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에너지와 반백년을 함께한 김방규 제나드시스템 고문과 함께 그때 그 시절의 옛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전기저널 독자를 위해 간략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1961년 한전의 전신인 경성전기에 입사해, 1970년대 송변전건설(현, 계통건설처) 업무를 담당한 김방규라고 합니다. 1980년대 한전 사직 후 평택LNG인수기지건설에 참가했고 이후 1990년대 선도전기㈜에 입사해 대표이사직에 오른 바 있습니다. 현재는 제나드시스템 고문으로 있습니다. 전기저널 인터뷰라니 떨리기도 합니다만, 오늘은 제가 경험했던 업무와 그 시절의 옛 이야기들을 풀어 볼까 합니다. 다소 두서 없더라도 잘 정리 부탁드립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입사하신 1961년부터 시작해 볼까요?
1961년 5월 1일 경전에 입사를 했는데, 5·16 쿠테타 이후 불과 두달 만인 7월 1일 3사(경성전기, 조선전업, 남선전기)가 한전으로 통합되었습니다. 졸지에 경전의 ‘마지막 입사자’가 된 셈이지요. 초임지가 퇴계로의 남부영업소(현, 중부전력소)였는데 그 당시만 해도 전력이 모자라다보니 낮에는 제한 송전을, 저녁 7시부터 12시까지는 전등만 켤 수 있도록 공급했던 시기입니다. 그러다보니 밤늦게까지 일해야 하는 업체들은 전기가 부족하다고 항의하기 일쑤였는데, 몰래 추가로 사용하는 업체를 찾아다니느라 그 당시만 해도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녔더랬죠. 그래서 그런지, 필동3가, 대한극장 일대의 인쇄소나 연탄공장, 하꼬방이라 부르던 수많은 판자집을 전전하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지금 세대는 상상하기도 힘들겠습니다만, 가정마다 일정한 개수의 전등만 허용한 ‘정액등’과 이를 감시하는 ‘천용반’이란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때 천용반이 가택에 들어가 규정 이상의 콘센트나 다리미 등의 가전제품을 발견하기라도 하면(지금이야 남의 집에 들어간다는게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만) 벌금을 호되게 물려, 등에 아기를 업은 젊은 처자가 울고 불고 했더랬습니다. 지금이야 사시사철 에어컨을 틀고, 계량기만 봐도 척하니 확인이 되는 시대입니다만, 전력이 모자랐던 시대의 단면이 아닐까 합니다.
노동조합에서 오랫동안 활동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송변전건설지부의 지부위원장으로 활동했습니다. 직장 내 노조라는게 어쩌면 당시의 시대에 한발이나마 담그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네요. 반골기질이 있는지 운영진과 크고 작은 마찰이 있기도 했는데 그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조합비 인상을 반대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당시 한전은 입사하면 무조건 노조에 가입되고, 월급의 일부를 조합비로 공제했는데 운영진이 이를 바탕으로 노조회관의 설립을 추진했더랬죠. 그러나 노조는 조합원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조직이지 운영진을 위한 조직이 아니지 않습니까? 더구나, 부족한 비용을 거두기 위해 조합비를 올리겠다는 안건을 올리니 결사반대하지 않을 수 없었죠. 그 외에도 임금인상과 관련이 없는 정치적인 모임에 조합원을 동원하라는 둥 운영진의 주요 안건마다 반대를 하다보니 눈치가 보통 보이는 것이 아니더군요.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1988년 이듬해부터 제한적으로 해외여행자유화가 시작된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그 이전의 1970년대에 이미 일본으로 연수를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상당히 이른 시기에 한전에서는 직원 중 일부를 해외로 연수를 보냈습니다. 저 또한 1979년도, 여행자유화가 되기 한참 이전부터 일본 연수를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에는 일본 유슈의 기업이 출자한 ‘해외기술자연수협회’란 연수기관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일본의 앞선 기술을 주요 거래국가의 실무자에게 전수하는 역할을 했죠. 제가 재직하던 송변전처의 6명을 비롯해 일본 전력회사와 거래하던 국내 기업의 실무자들이 4개월이란 긴 기간 동안 파견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해외로 나가려면 중앙정보부의 신원조회를 거쳐야 하는데 이를 계기로 노조활동을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전력 외에도 인쇄, 성냥 등 다양한 분야의 실무자들과 교류하고, 주말에는 여행도 하는 등 즐거운 추억을 쌓으면서도 일본의 선진화된 기술력이 마냥 부럽기도 했더랬죠.
남들보다 이른 시기에 일본을 가셨는데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도 적지 않으실 듯 합니다.
아키하바라에서 당시 국내에서는 없던 진공관 라디오를 샀을 때의 일입니다. 국내에서는 구할 수도 없는 물건이니 제품을 보자마자 일단 구매하였는데, 제 말이 어눌한 것을 눈치챈 상인이 국적을 물어 보더군요. 한국이라고 하니 주파수가 달라서 사용이 어렵다며 선뜻 환불을 해주더라구요. 상인의 입장이 아니라, 고객의 입장에서 행동하는 장면에 감동을넘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교육을 마친 이듬해 아내와 다시 일본여행을 갔습니다. 당시 유명하던 ‘코끼리 밥솥’을 사왔는데 전압 차이로 어렵사리 환불한 기억도 나네요. 당시만 해도 일본의 기술력이 부럽기만 했는데…. 현재 일본에서 한국을 부러워하는 것 중에 하나가 전국적으로 220V 승압에 성공한 것이니 새삼 놀랍기만 합니다.
선도전기에 이사로 입사해, 대표이사에 오르셨다는데 어떤 업무를 수행하셨는지요?
1989년부터 2006년까지 선도전기 이사로 입사해 대표이사에 오르기까지 제가 공헌한 것이 있다면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송전선 보호계전기를 디지털화한 것이고, 두 번째는 차단기를 GIS(Gas Industrial Switch)하는데 성공한 것, 세 번째는 154㎸ 변압기를 국산화한 것을 꼽고 싶습니다. 보호계전기든 차단기든 국내 기술로는 역부족이라 초기에는 미쯔비시, 도시바, 니신 등 일본기업의 기술을 들여왔으나, 순차적으로 자국화하는 방식으로 국산화에 투자한 것이 선도전기가 현재까지도 전력분야의 대표 중소기업이자 상장기업으로 견실하게 운영될 수 있는 비결이 아닐까 합니다.
마지막으로 업계의 동료 및 선후배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좋아하시는 명언도 좋습니다.
사실 차단기의 경우 선도전기에 앞서 동일전기가 OCB(Oil Circuit Breaker)의 개발에 성공해 독점에 가깝게 시장을 장악했으나, 지구 온난화와 후발주자에 의해 현재 기업 자체가소멸되었습니다. 기업경영에 영원한 강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가끔 학생들을 만날 기회가 생길 때마다 끊임없이 노력할 것을 주문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