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피를 탐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생명체. 마늘, 성경책, 성수, 십자가 등으로 대적할 수 있으며 한낮의 태양 아래에선 온몸이 불타버리는 존재. 짐작가는 인물이 있는가. 오랜 세월 다양한 매체와 작품들에서 다루어 왔기에 익숙한 존재, 바로 뱀파이어다. 그리고 1897년 아일랜드의 작가 브램 스토커가 쓴 소설 ‘드라큘라’를 모티프로 만든 뮤지컬 ‘드라큘라’가 10주년 기념 공연으로 돌아왔다.
뮤지컬 ‘드라큘라’는 트란실바니아의 영주 드라큘라가 영국 이주를 위해 부른 변호사 조나단과 그의 약혼녀 미나를 만나게 되면서 시작된다. 400년 전 죽은 연인 엘리자벳사를 꼭 닮은 미나를 보며 드라큘라는 단번에 그녀가 엘리자벳사의 환생임을 직감한다. 미나에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지만 드라큘라는 개의치 않고 그녀를 되찾기로 마음먹는다. 그렇게 비극은 시작된다. 자신의 행동이 모두 옳고 정당하다고 생각했던, ‘영원히 저주받은 생명’을 얻게 된 이후 정신적으로 전혀 성숙하지 못한 백작님으로 인하여.
‘드라큘라’는 서사가 친절한 작품은 아니다. 사전 정보 없이 보게 된다면 엉성한 스토리라인과 주인공들의 이해 못 할 감정으로 인해 공연을 보는 내내 의문이 한가득 쌓일 수도 있다. 실제로 이 작품의 세계관이 가진 허점에 대해 지적하는 의견도 상당하다. 작품성을 중요시하는 관객에게는 불호일 확률이 높은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디컴퍼니는 영리하게도 이러한 부족함을 캐스팅으로 완전히 지워버린다. 그것도 몹시 전략적으로. ‘브로드웨이 역사상 가장 매혹적인 입맞춤’이라는 대표 문구에 걸맞게 매혹적인 배우들을 드라큘라로 캐스팅하며 부족한 점을 보완한 것이다. 눈에 뻔히 보이는 수작임을 알면서도 관객이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정말로 완벽한 보완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훌륭한 대처법은 없을 것이다. 인간은 철저하게 시각화된 동물이며 ‘드라큘라’는 완벽하게 숭고한 사랑으로 점철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등장인물인 드라큘라, 조나단, 반헬싱은 모두 짙은 순애보를 보여주고 있다. 사랑 앞에서 그 어떤 논리나 이성의 잣대도 우선시될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와 관련해 故마광수 작가는 ‘관능적 경탄’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진짜 사랑은 ‘관능적 경탄’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말하자면 첫눈에 보고 반해야 하는 것이다. …(중략)… ‘관능적 경탄’은 시각에 의존한다. …(중략)… 그러니까 첫눈에 보고 반하는 사랑은 ‘상대방의 외모에 대한 경탄’에서 출발할 수밖 에 없다. ‘외모’에는 얼굴뿐만 아니라 키, 헤어스타일, 화장, 옷 차림 등이 다 포함된다. ‘첫인상’이 중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첫인상이 모든 연애의 성패를 좌우한다.”
이번 시즌 드라큘라를 맡은 배우는 전동석, 김준수, 신성록 3인으로 큰 키, 매력적인 음성, 뛰어난 가창력, 수많은 팬을 보유했을 정도로 준수한 얼굴 등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전동석은 붉은 컬러렌즈를, 김준수는 붉은 머리를, 신성록은 붉은 아이섀도 등을 통해 각자의 드라큘라를 완성했다. 초반에 백발의 노인으로 분장한 이들은 약 20분이 지난 뒤 나오는 넘버 ‘Fresh Blood’에서 본격적으로 미나를 되찾기 위해 움직인다. 자신의 성에 갇힌 조나단의 피를 마시고 젊어진 것이다. 빨간 망토 속에 감춰져 있던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관객은 숨이 멎는 경험을 하게 된다. 후드를 벗고 드러난 젊고 잘생긴 얼굴, 흡혈하고 젊어진 뒤 확연하게 달라진 목소리,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 무대를 뛰어다니며 보여준 장악력까지. 관객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관능적 경탄’의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드라큘라의 얼굴이 개연성’이라는 관객들의 우스갯소리를 마냥 웃어넘길 수 없는 이유다.
그렇다고 외적으로 완벽한 드라큘라의 모습만이 이 작품의 부족한 서사를 채우는 것은 아니다. 당초 브로드웨이 버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넘버 ‘She’는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귀한 노래이기도 하다. 드라큘라에게 피를 내어주고 몸이 쇠약해진 상태로 성에 갇혀있던 조나단은 간신히 탈출해 부다페스트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미나는 바로 조나단을 만나러 가기 위해 기차역으로 향한다. 드라큘라는 기차역에서 미나에게 다가가 400년 전 자신과 엘리자벳사의 위대한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드넓은 숲 펼쳐진 곳. 맑은 공기 가득한 곳에 한 젊은 왕자가 살았었죠. 헌신적인 사랑으로 신을 따른 믿음의 왕자. 신에게 모든 걸 다 바쳤죠. … 행복한 날도 잠시뿐. 암흑의 시간들이 덮쳐 신을 위한 전쟁이 터졌죠.”
결국 엘리자벳사는 드라큘라를 대신해 죽음을 맞이하고, 드라큘라는 엘리자벳사를 살려달라 간절히 기도한다. 그러나 신은 그의 기도를 외면하고 사랑하는 연인 엘리자벳사는 죽고 만다.
“신이시여. 나의 모든 것을 바쳤잖아. 내 말 안 들리나 대답해 봐. 좋아 신 따위는 필요 없어. 정말 미치도록 널 저주해. 평생 그녈 위해 복수하리, 내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서라도. … 무엇도 이젠 의미 없어. 내 몸 저주받아. 아파하고 아파해도 그녀에게 갈 수 없죠. 차라리 내 고통의 삶 끝내주소서.”
드라큘라에게 남은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은 저주받은 몸뚱아리뿐. ‘She’는 한국공연에서 관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든 노래로, 이를 통해 관객은 드라큘라가 어쩌다 신을 저주하고 남의 피를 탐하는 괴물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다. 그와 더불어 흡혈귀가 되어버린 그의 삶에 깊이 공감하고, 아파하며, 그를 이해하게 된다. 특히 ‘She’가 끝난 직후 이어지는 ‘At Last’ ‘Loving You Keeps Me Alive’는 드라큘라가 미나의 마음을 돌리고자 오열하는 장면으로 아주 유명하다.
“그댄 내 삶의 이유. 나를 살게 한 첫사랑. 오랜 세월조차도 지울 수 없던 사랑. … 그댄 내게 단 한 사람. 내 허무한 삶의 유일한 빛. 당신만이 날 채워줄 나의 사람. 그대를 처음 본 순간 숨조차 쉴 수 없었어. 그 이름만 속삭여도 내 세상은 떨려. 우리의 인연은 시간을 넘어 함께할 운명. 이제 내게 돌아와. 함께 춤춰요. 새벽을 향하여.”
단언컨대 400년간 켜켜이 쌓여온 마음들은 사랑보다는 경애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게 드라큘라는 1막이 다 끝나지 않았음에도 관객에게 자신의 마음을 납득시키는 데 성공한다. 넘버 몇 개만으로. 그만큼 뮤지컬 ‘드라큘라’는 한국인의 입맛에 꼭 맞는 넘버들로 구성되어 있다. 한 번 들으면 금방 마음을 빼앗겨버릴 정도로 매력적인 멜로디와 가슴 절절한 가사들은 극에 순식간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이나 마찬가지다.
뿐만 아니다. ‘드라큘라’만의 무대장치는 관객이 판타지 로맨스라는 장르에 빠져들 수 있도록 돕는다. 뮤지컬 ‘드라큘라’는 국내 최초로 도입된 4중 회전 턴테이블 기술을 통해 스토리의 흐름에 맞춰 무대를 전환한다. 극의 초반부 조나단이 성에서 도망치려 하지만 결국 드라큘라 앞에 도착하고 마는 ‘Fresh Blood’, 미나와의 첫날밤을 보낸 드라큘라가 반헬싱 무리와 대적하는 넘버 ‘It’s Over’ 등은 4중으로 회전하는 무대가 더욱 박진감 넘치게 현장감을 살려준다. 또한 뱀파이어와 미나가 정신 교감을 하는 장면을 표현하기 위해 드라큘라가 서있는 관이 허공에서 내려오는 넘버 ‘Train Sequence’ 역시 판타지 특성의 장르를 극대화하고 있다. 400년간 이어져 온 사랑과 판타지라는 장르에 관객이 집중할 수 있는 것은 무대장치들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뮤지컬 ‘드라큘라’는 미나 머레이라는 여자 주인공을 통해 부족한 서사를 관객의 상상력으로 채울 수 있게 하는 발상의 전환을 꾀한다. 미나는 드라큘라가 400년간 기다려온 첫사랑 엘리자벳사의 환생으로, 극이 진행될수록 심경이 극적으로 변하는 입체적인 인물이다. 극의 초반에는 약혼자인 조나단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드라큘라를 외면하지만, 2부에서는 끝내 드라큘라를 외면하지 못하고 그를 받아들이는 인물이기도 하다. 짧지 않은 시간 마음이 극에서 극으로 변하게 되는 인물인데, 바로 이 부분이 관객이 가지는 불호의 지점이기도 하다. 급하게 변하는 인물의 마음에 공감하기엔 주어진 정보도 대사도 서사도 부족하기만 하다. 이를 관객에게 납득시키고자 미나 역의 배우들은 주어진 대사를 활용해 최대한 자신만의 미나 머레이를 완성시킨다.
초연 이후 10년 만에 합류한 정선아는 선을 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미나를 연기한다. 적당히 좋은 약혼자를 만나 예정된 결혼을 기다리며 나름의 행복한 삶을 꿈꾼채 공허한 마음으로 살아왔던 미나. 위대한 사랑을 속삭이는 드라큘라를 만나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지만 끝끝내 약혼자를 배신하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미나. 그리하여 끝을 맞이한 드라큘라의 관 앞에서 흩날리는 눈을 보며 그가 구원받았을 거라 생각해 희미하게나마 웃어 보일 수 있는 미나. 정선아가 연기하는 미나는 보다 인간적이고 보다 관객에 가까운 미나다. 그가 마지막 순간만큼은 구원받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그런 미나 말이다.
반면 지난 시즌에서도 드라큘라에 합류했던 임혜영의 경우 팬들로부터 ‘마라맛 미나’라고 불리는 미나답게 극의 초반부터 드라큘라에게 끌리는 모습을 숨기지 않는다. 400년 전 이야기를 듣고 드라큘라에게 흔들리지만 현실을 무너뜨릴 수 없기에 약혼자에게 돌아가는 모습이 그렇다. 눈물범벅인 얼굴에 약혼자를 향한 사랑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현실을 지켜야 하기에 돌아섰을 뿐.
친구인 루시가 죽고 드라큘라를 부르며 소리치는 장면 역시 그러하다. 드라큘라의 “미나. 당신은 날 사랑하잖아”라는 질문에 다른 미나들은 ‘사랑하지 않는다’며 부정하지만 임혜영만이 “아니. 난 당신을 사랑할 수 없어.”라고 말한다. 이미 사랑하고 있지만 사랑해선 안 된다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미나인 셈이다. 임혜영만의 “난 지금의 삶을 지키고 싶을 뿐이에요.” 역시 그녀의 연기 노선을 극명히 드러내는 지점이다. 그리하여 피날레에서 관을 두드리며 드라큘라를 부르는 목소리는 그 어떤 미나보다 오열에 가깝다. 마지막 노래 “신이시여, 그가 가엽지 않나요. 오직 사랑만을 위한 그를 용서해요.” 역시 신을 향해 휘몰아치고 있는 분노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보다가 참지 못하고 절규하며 무너지는 미나는 드라큘라가 지닌 비극성을 한껏 고조시켜 관객들에게 마지막까지 슬픔을 상기시키는 미나이기도 하다. 이처럼 배우마다 부족한 스토리를 자신의 캐릭터 해석으로 채워주고 있으며, 이것이 관객들로 하여금 ‘회전문(같은 공연을 여러 번 관람하는 것을 뜻함)’을 돌게 하는 지점일 것이다.
뮤지컬 ‘드라큘라’가 불경기 속에서도 연일 전석 매진을 기록하게 하는 힘은 어쩌면 누구나 꿈꿔온 순애를 넘어 경애에 가까운 사랑에서 온 것이 아닐까. 진정한 사랑이란 내가 원하는 것보다는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주고자 하는 것에 있다고 한다. 물론 뮤지컬 속 드라큘라의 사랑이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어쩌면 비뚤어졌다고 볼 수도 있다. 400년간 이어져 온 자기혐오에 빠져 제대로 된 정신적 성장을 치르지 못한 남성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하는 사랑은 ‘내가 주는 것은 뭐든지 좋은 것이니 받아들여. 내 마음까지도’에 가까운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사랑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도 시간이 지나며 본인보다 상대를 생각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 그렇게 변화하는 지점이 인간이 아닌 존재를 누구보다 인간적으로 보이게 하고, 그의 마음에 공감하게 만드는 건지도 모른다.
극 중 반헬싱을 죽이려는 드라큘라를 막아서며 미나는 말한다. “난 그 누구의 죽음도 원하지 않아요.” 크게 상처받고 떠난 드라큘라는 결국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 인정하게 된다. 자신이 하고 있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닌 이기적인 마음이었을 뿐임을. 미나를 위해 자신이 떠나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미나가 말한 ‘그 누구의 죽음’에는 드라큘라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는 기꺼이 그녀를 위해 죽기로 결심한다. 미나가 자신처럼 피를 탐하는 끔찍한 존재가 된다는 것의 무게를 깨달아버렸기 때문이다. 양지에서 빛나던 미나를 자신이 있는 어둠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사랑이 아님을, 미나를 다시 빛의 세계로 돌려보내기 위해선 자신이 죽어야 함을 깨닫는 그 순간은 드라큘라에게도 관객에게도 견디기 힘든 순간이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꼭 거쳐야 하는 깨달음의 순간이지만, 사실은 영원히 멈춰있고만 싶은 순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떠나야 한다는 마음, 그럼에도 조금이나마 그 사람 곁에 더 머물고 싶은 마음, 이 사람을 두고 떠나야만 하는 현실이 못내 서러운 마음까지도 고스란히 느껴지는 마지막 순간. 드라큘라는 미나에게 애원한다. 그녀 손에 죽는 것이 400년간 기다려왔던 구원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나의 절망 속에 널 가둘 수 없어. 피와 고통의 세계를 떠나줘요. 차가운 암흑 속에 저주받은 내 인생. 남의 피를 탐하는 그늘 속의 영혼. 이런 삶 이런 인생 죽음보다 괴로워. 나를 사랑한다면 자유를 줘요. 부탁해요, 제발. 밤을 허락해요. 영원한 안식을 찾을 수 있게. 사랑해요 그대. 그댈 사랑해요. 사랑해서 그댈 위해 내가 떠날게요.”
그것이 정말로 온전한 구원이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미나 조차도. 그저 관이 닫히기 직전까지 뻗고 있던 드라큘라의 손이 미나에게 끝내 닿지 못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닫혀버린 관에 대고 외치는 미나의 절규를 들으며 관객은 간절히 바랄 뿐이다. 신이 그를 가엾어하기를. 그리하여 ‘오직 사랑만을 위한 그를 용서’해주기를.
이승희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