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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좋아하세요?] ‘파묘’는 왜 험한 것을 등장시켰나
[영화, 좋아하세요?] ‘파묘’는 왜 험한 것을 등장시켰나
  • 이준범
  • 승인 2024.04.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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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영화 '파묘'(쇼박스 제공)
사진=영화 '파묘'(쇼박스 제공)

<영화 ‘파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총 6부로 구성된 영화 ‘파묘’(감독 장재현)는 언뜻 3부에서 끝날 수 있었을 이야기처럼 보인다. 실력 좋은 무당과 풍수사, 장의사가 뭉쳐 갖은 어려움 끝에 악지(惡地)에 묻힌 친일파 조부의 관을 화장하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는다. 장재현 감독이 전작 ‘검은 사제들’ ‘사바하’에서 보여준 이야기와 비슷한 결이기도 하다.

그러나 갑자기 정체 모를 거대한 괴물이 등장하면서 영화는 다른 방향으로 꺾인다. 그 순간은 새로운 영화의 시작처럼 보이기도 하고, 후반부를 위한 긴 예고편에 속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나 악령을 다룬 오컬트 영화에 좀비처럼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정령(精靈)이 등장하는 건 모험에 가깝다. 관객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렸다. 1,000만 관객을 돌파한 ‘파묘’를 둘러싸고 이미 많이 회자된 이야기다. 장르 전환에 당황해 몰입하지 못했다는 아쉬운 반응도 나왔다. 전반부 이야기가 마음에 든 관객은 배신감이 들었다고도 했다. ‘파묘’는 대체 무엇을 위해 두 이야기가 이어진 형태로 완성됐을까. 꼭 필요한 선택이었을까. 답이 엇갈릴 만한 질문이다. 감독의 판단에 동의하는 입장에서 몇 가지 답을 찾아봤다.

사진=영화 '파묘'(쇼박스 제공)
사진=영화 '파묘'(쇼박스 제공)

좋지 않은 것

친일파 조부의 관을 화장하며 끝난 줄 알았던 이야기는 상덕(최민식)이 무덤 아래 숨겨진 또 다른 관을 발견하며 다시 시작된다. 수직으로 묻힌 거대한 관을 본 화림(김고은)은 건드리지 말자고 말한다. 그래도 모른 척 놔둘 수 없다는 상덕의 말을 따라 함께 관을 무덤 인근 보국사에 옮긴 후, 화림은 관 주변을 찹쌀과 말피로 꼼꼼히 봉인한다. 의아해하는 일행에게 화림은 말한다. “좋지 않은 게 있다는 건 다들 아시잖아요.”

처음 의뢰자의 고모는 의뢰비는 챙겨줄 테니 새로운 관은 ‘알아서’ 처리해 달라고 주문한다. 이때부터 사건을 대하는 상덕 일행의 태도가 달라진다. 이전까진 의뢰받은 사건을 해결해주는 제3자의 입장이었다면, 이제 직접 해결해야 하는 당사자가 됐다. 모든 결정과 책임이 그들의 몫이 되면서 영화의 방향성과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다. 사건 해결 여부가 아닌, 생존이 관건이 된다. 이전보다 위험을 직면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일직선으로 이어지던 길이 여러 갈래로 펼쳐지며 혼란도 커진다. 준비할 시간도 없이 이미 사건이 시작됐다는 점도 문제다.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사건에 인물들은 하염없이 이끌려 간다.

전반부 이야기에서 네 인물은 전문가에 가까웠다. 냉정하게 판단하고 깔끔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개인감정이 끼어들면 여지없이 비판이 날아들었다. 변수가 없다면 대부분 일은 순탄하게 흘러간다. 의뢰인이 조부의 혼에 빙의돼 대동아공영을 외치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친일파와 관련된 일이란 걸 직감한다. 그 모습을 지켜본 상덕 역시 이를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관객들이 느끼는 불편한 감정을 이들은 한 차례도 언급하지 않는다. 자신이 맡은 일을 할 뿐, 의뢰인의 정체나 사연이 일에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듯한 태도다. 화림이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승무원에게 자신을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라고 소개하는 첫 장면처럼 은근히 정체성을 드러낼 뿐이다.

‘파묘’는 무대 밖에 존재하던 네 명의 인물이 무대에 올라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다. 후반부 사건이 시작되면 이들은 어두운 곳을 이해하지 못하는 밝은 곳의 사람들을 상대할 필요도, 땅을 파먹고 살며 생명의 순환과 유한함을 느낄 여유도 없다. 새로운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이 일에 뛰어들지 결정하는 것도 모두 각자의 몫이다. 금전적 보상이 없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의견이 엇갈리지만, 결국 같은 결론을 내는 식으로 이야기는 이어진다. 왜 이 일을 맡아야 하는지 각자 그 이유를 찾는 과정은 이들이 왜 이 일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처럼 보인다.

사진=영화 '파묘'(쇼박스 제공)
사진=영화 '파묘'(쇼박스 제공)

핏줄이다

상덕 일행이 찾아낸 이 일을 해야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한민족의 허리를 끊은 쇠말뚝을 뽑는 것, 그리고 혼수상태에 빠진 봉길을 살리는 것이다. 영근(유해진)은 우리가 살아야 할 땅을 위한 일이란 상덕의 말엔 질색하지만, 사람의 목숨이 달렸다는 화림의 말엔 반박하지 못한다. 아무리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어도 자신의 목숨을 걸 수 있을까. 엄밀히 말하면 이들은 핏줄로 이어진 가족도 아닌데 말이다. 상덕은 첫 등장하는 이장 장면에서 돌아가신 할머니 틀니를 몰래 숨긴 손자를 보고 ‘핏줄’을 떠올린다. 죽어서도 절대 벗어날 수도 없는, 같은 유전자를 가진 육체와 정신의 공혈(共血) 집단이 가족이라고 말한다. 가족은 ‘파묘’를 관통하는 테마다. 염을 하고 묘를 세우는 일, 더 나아지기 위해 굿을 하는 일 모두 가족을 위한 일이다. 피가 섞이지 않은 타인을 위해 무덤을 만들거나 굿을 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가족을 위한 일로 모이는 타인들이 가족처럼 밥과 술을 나눠 먹고, 한 곳에서 잠을 잔다. 목숨이 걸린 결정적인 순간에 모른 척하기 어려운 이유 역시 이 같은 기억이 무의식에 잠들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후반부 이야기는 이들을 각자 분야에서 자부심을 갖고 일하는 전문가로 뭉친 집단에서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단단한 공동체 집단으로 만들어준다. 단순히 위기를 함께 극복하고 서로를 위한 희생정신을 보여줬기 때문이 아니다. 핵심은 기억의 공유다. ‘파묘’는 네 사람이 같은 기억을 쌓아가는 이야기다. 강렬한 사건을 함께 겪으며 잊지 못할 공통의 기억을 끈끈하게 공유하게 된다.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았지만 마치 하나의 가족과 다름없다. 영화를 지켜보는 관객 역시 이들만 아는 사건을 기억하는 은밀한 목격자의 위치에 놓인다.

딸 결혼식에서 상덕은 가족사진을 찍는 자리에 영근, 화림, 봉길도 오라고 채근한다. 세 사람은 가족도 아닌데 가족사진을 왜 찍냐고 투덜대며 어색하게 걸음을 옮긴다. 그 순간 혹시 이들의 머릿속엔 아마 같은 기억 속 장면들이 스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 정도면 가족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사진=영화 '파묘'(쇼박스 제공)
사진=영화 '파묘'(쇼박스 제공)

혼령과 정령

상덕 일행은 보국사에서 정령을 직접 대면하고 넋을 잃는다. 칼을 휘두르는 거대한 장군과 도깨비불, 두 가지 형태 모두 그렇다. 유골이 든 오래된 관을 열면서도, 실체가 불분명한 혼령의 존재를 느낄 때도 놀라지 않았던 이들이다. 영화에선 이들이 말을 잇지 못할 만큼 정령이 한국에 없는 기이하고 낯선 존재로 그려진다. 일본 음양사가 만든 창조물이란 것 외에 자세한 설명은 없다. 이들에겐 정령이 사람을 마구잡이로 해치는 매우 위험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그것과 맞서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보통 한국형 오컬트 장르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장재현 감독을 소개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신앙을 둘러싼 이야기를 다룬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 세계의 존재가 눈에 보이는 세계에 모습을 드러낼 때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이야기였다. 장 감독의 전작 주인공이 천주교, 기독교를 믿었다면, ‘파묘’엔 무속 신앙을 믿는 전문가들이 등장한다. 감독은 이들의 믿음이 흔들리고 약해지는 순간을 포착해 영화에 담았다.

다만 전작들에서는 위험한 무언가가 존재하지만, 실체가 등장해 직접 공격하진 않았다. ‘검은 사제들’에선 인간의 몸에 빙의된 혼령과 여러 언어로 대화를 나누며 접촉했고, ‘사바하’에선 신과 같은 능력을 손에 넣은 평범한 인간이 등장했다. 실체 없는 무언가가 인간의 신체에 깃들어 우리 눈앞에 실물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감독은 영화 속 인물들이 그것을 만지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것이 실제 존재하는 것처럼 관객들을 설득했다.

‘파묘’는 다르다. ‘파묘’엔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할 존재가 땅을 밟고 모습을 드러낸다. 아마 상덕 일행이 정령을 대면하고 충격을 받은 건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규칙이 무너진 균열을 ‘목격’했다는 실감 때문일 것이다.

‘파묘’는 저 세계보다는 이 세계를 다룬 영화에 가깝다. 어두운 곳에 존재하는 것들을 다루는 건 전작과 같지만, 밝은 곳에 있는 인간들의 존재감이 훨씬 강하다. 잘 모르는 세계관을 길게 설명하지 않고, 혼령을 두렵고 무서운 강력한 존재로 그리지도 않는다. 대신 육중한 무게를 자랑하는 정령을 단단한 땅에 발을 딛고 선 인간들에게 가장 상극인 존재로 등장시킨다. 그 땅을 파먹고 사는 사람들, 땅을 파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에 어울리는 존재이기도 하다. 영화 속 허구를 과연 어디까지 믿을지 관객을 시험하는 것 같기도 하다. 조금씩 넓어지고 있는 ‘장재현 월드’를 계속 믿을 것인가. 어쩌면 후반부 이야기에 실망하지 않고 끝까지 몰입해서 믿고 본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시험에 통과해 그 다음 단계로 가는 티켓을 받은 것 아닐까.

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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