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뮤지컬 <브론테>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 청소년 필독서에 늘 빠지지 않는 작품들이다. 책은 읽지 않았어도 제목만은 누구나 들어봤을 유명한 고전문학. 그러나 대다수는 두 작품의 작가가 자매라는 사실 을 알지 못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아그네스 그레이’ 작가까지 세 자매라는 사실도. 뮤지컬 ‘브론테’는 작가이자 자매였던 샬럿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 앤 브론테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여자가 글을 쓰는 일 따윈 허락되지 않던 빅토리아 시대. 음울하고 외로운 요크셔의 황야에서 가난한 목사의 딸로 태어난 세 자매는 목사관에 사는 유령들이라는 비아냥에도 개의치 않는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놀이를 이어 나간다. 언니 둘을 먼저 떠나보내도, 가난한 집에서 밝은 미래라곤 기대할 수 없어도 지치지 않고 글쓰기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는다. 샬럿의 자기소개로 시작하는 ‘우리만의 놀이’는 자매들이 힘든 상황에서도 글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고 서로의 세계를 확장해 왔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이건 우리만의 커다란 놀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생쥐 같던 이야기들이 사자만큼 커다래져 지루한 낮을 삼키지. 우린 책 속에서 거인이 되지. 소설은 우리의 방패가 되지. 브론테는 브론테만의 방식으로 해뜨기 전 찬란한 새벽이 되지.”
해당 넘버는 당시 여자에게 허락된 인생은 결혼, 출산, 가정교사, 병사 등의 선택지뿐이라고 꼬집고 있다. 실제로 그 시절 여자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이란 재료 손질, 요리 준비, 자수하기, 기도하기, 낮잠 자기 등밖에 없었을 테니 브론테 자매가 유령이나 괴짜로 불리며 손가락질받았던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을 터다. 그러나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세 자매는 자신들의 길을 개척해 나간다. 이들은 ‘순한 얼굴을 가진 조물주의 반항아’로 살면서 ‘글 속에 은밀하게 숨겨둔 반항들’을 통해 작가로 서의 삶을 이어 나간다.
특히 ‘우리만의 놀이’에서 여자들의 삶을 표현할 때 쓰인 흰 천의 활용도 인상적이다. 세 자매는 흰 천을 앞치마나 기도할 때 쓰는 미사보로 만들거나 낮잠 잘 때 덮고 자는 이불로 활용하기도 한다. 그들이 웃으며 가지고 놀던 하얀 천은 어떤 색으로든 물들일 수 있는 그들의 세계 그 자체일 것이다. 이를 통해 관객 역시 바라게 된다. 브론테 자매가 꿈꾸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기를, 그들의 세계가 끝없이 확장되기를. 그리하여 샬럿의 “어떤 간절한 마음은 시간도, 순간도, 불가능마저도 뛰어 넘을 수 있다”는 말처럼 그들의 글에 담긴 간절함이 시대적 불평등함도 뛰어넘을 수 있기를.
이들의 이야기는 에밀리가 어떤 목소리를 듣게 되면서 첫 전환점을 맞이한다. 자매들이 출간한 시집이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자 절망하며 방에 틀어박혀 있던 에밀리에게 자매들 누구도 듣지 못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아주 먼 미래에서 에밀리를 부르는, 귀가 아닌 심장에서 느낄 수 있던 목소리. 어떠한 단어나 문장으로 구성된 소리는 아니지만 들으면 써야만 할 것 같은 마음을 느끼게 하는 목소리 말이다. 세 자매는 에밀리가 들었다던 목소리에서 영감을 얻고 소설 작업을 시작한다. 자매가 글쓰는 작업에 몰두하며 저마다의 공간에서 부르는 넘버 ‘써 내려가’는 배우들이 쌓아나가는 화성이 단연 돋보인다.
“써 내려가 써 내려가. 조그만 페이지 빼곡히 채워봐.”
“세 명의 서로 다른 선율로 연주해.”
“어느 날 찾아온 신비로운 편지. 그것은 사랑을 고백하는 연서. 그녀가 죽고 없는 미래에서 그녀를 잃은 누군가가 보내왔지.”
“작가는 지독한 병을 앓고 있어. 죽어가면서도 포기 않고 글을 쓰지. 아무도 그녀를 인정하진 않지만 어떤 누군가는 작가를 지지하지.”
“죽음의 문턱에서 무엇을 보게 될까. 현실을 벗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짧았던 삶의 그녀는 알게 될까. 자신의 삶이 존재했던 이유를.”
“너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이 세상 모든 종류의 사랑. 넌 나의 가장 완벽한 글. 넌 나의 오지 않은 내일. 넌 내가 아직 꾸지 않은 꿈.”
대학로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여성 3명만이 등장하는 뮤지컬. 그동안 쉽사리 들어볼 수 없었던 여성 삼중창의 선율은 소리가 주는 감미로움 뿐 아니라 어떠한 희열까지 느껴진다. 그러나 글을 비판할지언정 서로에 대한 비난은 삼가던 이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어떻게든 빨리 소설집을 완성해 경제적 독립을 해내고 싶은 샬럿과 작가로서 제대로 된 소설을 쓰고 싶은 에밀리가 부딪히기 시작한 것이다. 샬럿에게 에밀리가 쓰는 소설이란 늘 태양을 갈망하면서 결국 태양에 불타 죽는 결말이 우울한 글일 뿐이다. 과장을 조금 더 보태자면 누구도 원하지 않고 팔리지도 않을 글인 셈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정해진 시간 내에 소설을 완성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앤 역시 샬럿과 가벼운 갈등 구조를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 서 에밀리는 소설의 완성을 독촉하는 샬럿이 이해되지 않고 세 자매의 사이는 묘하게 삐그덕대기 시작한다. 서로 다른 세 명의 인물이 지닌 작가관이 상충하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이후 목사관으로 한 장의 편지가 도착하며 균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누가 보냈는지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샬럿을 비난하고 에밀리를 격려하며 앤에게 자신을 찾아달라고 당부하는 도무지 의도를 알 수 없는 글. ‘나는 너희가 어떻게 죽는지 모두 지켜봤어’로 시작되는 편지는 으스스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샬럿에게는 저주와도 가까운 불길하기 그지없던 이 편지가 에밀리에게는 마지막 한 걸음을 뗄 수 있게 해주는 격려가 된다. 늘 자신의 글에 확신을 가지지 못했던 에밀리는 그 편지로 인해 용기를 얻고 마침내 소설을 완성한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숨마저 소설의 연료로 불태운 듯 격렬하게 노래한다. “하늘 너머 저 태양이 날 태워 재가 된대도, 그 빛에 모든 걸 잃어도 뒤돌지 않아. 이 소설과 나처럼.”
그러나 완성된 에밀리의 소설 ‘폭풍의 언덕’은 자매의 갈등이 절정에 도달하도록 하는 도화선이 된다. 에밀리의 소설이 당시 용납될 수 없는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매가 함께 출판할 소설집에 찍힐 낙인이 두려웠던 샬럿은 에밀리를 다그치고 나무란다. 장녀로서 동생을 걱정하는 마음과 작가로서 사회 윤리를 무시한 에밀리에 대한 질타가 모두 뒤섞였을 터다. 반면 에밀리는 써야 한다고 느낀 대로 쓴 자신의 소설을 비난부터 하는 샬럿을 이해할 수 없고, 심지어 자신을 감싸며 상황을 중재하려는 앤에게조차 샬럿의 화살이 쏟아지는 것을 참을 수 없다. 결국 샬럿과 에밀리는 극이 시작된 후 가장 날카롭게 서로를 향해 폭발하는 감정을 쏟아낸다.
‘찢겨진 페이지처럼’은 대학로에서 쉽사리 볼 수 없었던 여자들만 나오는 극에서 등장인물들이 온몸으로 노래를 통해 싸우는 몹시 진귀한 넘버다. 가장 가깝다고 여겼던 가족에게 이해받지 못함에서 터져 나오는 야속함, 자신의 동생에게 쏟아질 게 뻔한 멸시와 조롱과 낙인들이 그려지는 데서 오는 공포, 작가로서의 세계관이 부정당한 것에 대한 분노 등 날 것의 감정들이 정면으로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고, 조각난 감정들은 폭발하듯 터지며 서로를 아프게 찌른다. 결국 관계는 봉합되지 못하고 샬럿은 여기서 갈라지자며 동생들에게 통보한 후 집을 나간다. 이후 이어지는 넘버를 통해 ‘제인 에어’라는 소설로 성공한 샬럿과 ‘폭풍의 언덕’이라는 소설로 대중의 뭇매를 맞는 에밀리의 모습이 대조되며 관객은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멀리 빅토리아 시대로 가지 않더라도 현재 우리도 자주 접하는 난제다. 작가는 쓰고 싶은 이야기와 읽히는 이야기 중 어떤 것을 써야 하는가. 정답은 알 수 없지만 작가가 써야 한다고 느끼는 대로 글을 쓰는 행위가 얼마나 행복한지는 에밀리를 통해 알 수 있다.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에밀리는 자신이 완성한 소설을 후회하지 않는다며 이렇게 말한다. “미래가 기다려졌던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지금은 좀 기대가 되네. 내가 죽고 난 후의 미래가.” 그렇게 뮤지컬 ‘브론테’는 작품 속 에밀리의 입을 통해 하고 있다. 글을 쓰는 것도, 소설을 완성하는 것도, 혹평이 빗발치는 순간들조차도 모두 꿈꿀 수 있는 반짝이는 시간일 뿐이라고.
그렇다면 동생들을 떠나 읽히는 이야기이자 팔리는 이야기를 쓰며 그토록 원하던 경제적 자유를 쟁취한 샬럿의 삶은 어땠을까. ‘샬럿 브론테. 그토록 원하던 성공을 했으니 지금쯤 얼마나 기세등등할까’라던 에밀리의 말처럼 행복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에밀리가 죽고 난 후 집으로 돌아온 샬럿은 후회하며 뒤늦은 진심을 토해낸다. “평생 성공을 꿈꿨지만 그게 나 혼자만의 성공은 아니었던 거야”라고. 부를 얻었음에도 샬럿이 행복할 수 없었던 건 동생들을 그 집에 버려두고 혼자만 성공을 좇아 도망쳤다는 죄책감이 평생 따라다녔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앤마저 죽고 홀로 남겨진 샬럿이 눈물범벅으로 부르는 ‘답장을 기다리며 리프라이즈’는 극의 초반부 출판사에 투고하며 설레는 마음을 표현하던 ‘답장을 기다리며’와 비교되며 더욱 비극성을 가미한다. 설렘은 절망으로 변하고 샬럿은 혼자만의 감옥에 갇혀 울부짖는다. 특히나 곧바로 이어지는 ‘이것이 소설이라면’ 넘버는 샬럿의 죄책감과 슬픔이 절정으로 치닫는 대목이다.
“이것이 소설이라면 악역은 분명 나겠지. 모든 걸 잃은 악역은 고요 속에 혼자 남겠지. 시간은 강물과 같고 결코 돌릴 수 없어. 신께서 주신 형벌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일까. 일그러진 소설 내가 받는 벌. 이제는 이 자유가 잔인한 감옥 같아. 악역의 독백은 끝나지 않고 누구도 듣지 못할 비명만이 남아 있어. 열병 같은 삶. 정말 끝이 있긴 한 걸까. 벗어나려던 나의 길은 다시 내 뒤를 쫓아와. 글은 나의 욕망 나의 모든 것. 여전히 난 커다란 불길이 되길 꿈꿔. 하지만 너희가 사라진 자리. 너희를 잃은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어.”
붉은 조명으로 가득 찬 무대. 샬럿은 동생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오열하며 소리친다. 떠나간 동생들을 다시 부르듯, 보이지 않는 신에게 고해하듯. 샬럿이 자신을 소설 속 악역이라고 칭하며 노래할 때 연출된 무대는 마치 그녀의 소설 ‘제인 에어’에 나오는 붉은 방을 떠올리게 한다. 붉은 방은 소설 속 주인공이 형벌과 공포, 두려움, 죽음 등을 느끼는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 속에 갇힌 샬럿을 보며 관객은 그녀가 얼마나 과거의 행동들을 후회하는지, 동생들에게 미안해하고 있는지, 현재 얼마나 절망적인지 등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후회는 언제나 늦고 삶은 계속되어야만 하기에 동생들이 떠난 뒤에도 샬럿은 형벌 같은 시간을 감내해 낸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앤의 메모가 선물처럼 발견된다. 그 메모를 통해 샬럿은 알게 된다. 자매가 과거에 받았던 정체불명의 편지는 동생들을 잃고 절망 속에 긴 시간을 견뎌온 샬럿 브론테, 그녀 자신이 보낸 편지였다는 걸. 미래에서 보낸 편지라니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관객은 이미 샬럿의 입을 통해 들은 적 있다. “어떤 간절한 마음은 시간도, 순간도, 불가능마저도 뛰어 넘을 수 있다”고. 그리고 샬럿은 떠나간 동생들을 그리워하며, 과거의 자신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길 바라며 절실하게 편지를 쓴다. “난 결국 내 사랑을 잃고 편지를 썼구나. 외롭게 남겨져 있던 난 너희에게 말하고 싶었어. 지나온 시간 속에 우리는 찬란했었다고. 내가 모두 지켜봤다고. …꼭 말하고 싶었어. 너희가 없었다면 ‘제인 에어’도 없었다고.” 그런 샬럿에게 에밀리는 웃으며 말한다. 샬럿이 없었다면 자신들의 소설도 없었을 거라고.
읽히는 이야기와 쓰고 싶은 이야기. 대중이 열광하는 이야기와 손가락질하는 이야기. 작가가 통제하는 세계와 인물들이 마음껏 뛰어놀게 만들어놓은 세계. 만약 우리가 작가라면 어떤 선택을 하는 게 좋을까. 하지만 우리는 정답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런 것을 고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그저 써야 한다고 느껴지는 대로 쓴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있음을. 무엇을 쓰던 그 과정이 치열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걸 말이다. 시대의 평가는 시대상에 따라 얼마든지 바뀌기 마련이다. 어쩌면 미래에서 온 편지는 그러한 위로를 담고 있었던 건 아닐까? 미친 말 뒤에 매달린 채 내달려도 좋으니 부디 스스로를 믿고 계속 나아가라고 말이다.
재연 때 추가된 앤의 넘버 ‘비유 없는 풍경’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흔히들 소설이라면 묘사와 비유가 가득한 문학을 떠올리고, 그렇기에 앤의 소설 ‘아그네스 그레이’는 비판의 대상에 오른 바 있다. 비유가 없기 때문에. 그러나 앤과 샬럿은 말한다.
“비유 같은 건 없는 오직 내게만 보였던 풍경. 어쩌면 나만이 쓸 수 있는”
“너밖에 쓸 수 없는”
“나만이 볼 수 있는”
그것이 무엇이 됐든 그 작가만이 쓸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온전한 하나의 세계다. 비유가 없어도, 작가가 통제할 수 없어도, 대중과 문단에 외면당해도 이미 만들어진 세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누군가의 가슴에 남아 영원토록 살아 숨 쉰다.
막이 내리기 전 함께 모인 자매들이 부르는 ‘써 내려가 PART.2’ 는 그래서 더욱 의미 깊다. 그들의 글과 영혼과 삶이 담겨 바뀐 가사들이, 그 음률이 아직 꾸지 않은 꿈을 품고 있을 누군가에게 닿길 바라는 것 같아서.
“어느 날 찾아온 신비로운 편지. 그것은 사랑을 고백하는 연서. 그녀가 죽고 없는 미래에도 시간을 넘어 영원해질 이야기.”
“작가는 지독한 병을 앓고 있어. 죽어가면서도 포기 않고 글을 썼지. 작가의 영혼은 문장 너머 숨 쉬며 그녀의 인생은 이야기로 남게 되지.”
“죽음의 문턱에서 그녀는 천국을 봐. 현실을 벗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천사로 인해 그녀는 깨닫지. 자신의 삶은 이미 충분했다고.”
“너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넌 나의 사랑. 나의 글. 마침내 올 내일. 너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넌 내가 아직 꾸지 않은 꿈.”
치열하게 매 순간 고민하고 써 내려갔던, 그래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인생을 살았던 브론테 자매의 이야기가 그들을 닮은 누군가에게 닿아 위로가 되길 바란다.
이승희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