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베어 더 뮤지컬>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누구나 사랑을 한다.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홀로 살아갈 수 없고 늘 타인과 상호작용 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인생에서 사랑은 필수 불가결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언제나 인간에게 설렘과 행복과 환희만을 선사하는가? 아니다. 아픔도 상처도 절망도 선사한다. 우리는 사랑이 가진 양면성을 알고 있으며,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사랑을 선택한다. 그것이 주는 행복이 한 번씩 찾아올 슬픔에 비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시간을 견디고 여러 사랑을 거치며 성숙해진 어른들의 입장일 뿐.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아이들이라면 어떨까. 그들에게도 사랑이 상처받을 줄 알면서도 기꺼이 선택할 만큼 소중하고 아름답기만 할까? 뮤지컬 ‘베어 더 뮤지컬’은 청소년들의 성장기와 인간애를 다룬 작품이다. 우리 사회가 규정지어 놓았던 사랑의 범위와 종류 등에 대한 질문을 폭넓게 던지고 있는 극이기도 하다.
주인공 피터와 제이슨은 보수적인 가톨릭계 고등학교인 성 세실리아 학교에 다니고 있다. 둘은 룸메이트로 처음 만난 순간 서로에게 반해 모두를 속인 채 비밀스러운 연인 관계를 이어온다. 하지만 피터는 커밍아웃을 원하고 제이슨은 자신이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운 마음에 이를 거부한다. 그러던 중 성 세실리아에서는 졸업 기념 공연으로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을 올리게 되고, 로미오 역은 제이슨이 줄리엣 역은 교내 퀸카인 아이비가 맡게 된다. 아이비는 극 중이 아닌 현실에서도 제이슨을 유혹하기 시작하고, 아이비를 짝사랑하는 맷과 그런 맷을 짝사랑하는 제이슨의 쌍둥이 여동생 나디아, 끝내 제이슨과 이별하게 된 피터까지 이들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뮤지컬 ‘베어 더 뮤지컬’은 작중에서 금기시되고 있는 동성애를 가장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피터는 특히나 이에 대한 죄책감을 크게 가지고 있는 인물로 표현되는데, 이는 첫 넘버 ‘Epiphany’를 통해 알 수 있다. 해당 넘버는 피터의 꿈을 표현한 넘버인데 여기서 친구들은 피터를 향해 변태, 더러워, 끔찍한 호모 새끼 등의 폭력적인 언어를 서슴지 않는다. ‘죄를 다 고백하고 영혼을 구원하라. 대가를 치를 거야. 천국은 멀어지네. 그만 멈춰 신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 천국은 멀고 문은 좁다’는 가사를 통해서 알 수 있듯 당시 시대상과 배경이 피터에게 끊임없이 죄책감을 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제이슨과 피터는 자신들만의 세상, 누구도 자신들의 사랑을 눈치챌 수 없는 낙원, 바로 기숙사 방 안에서만 사랑을 속삭여왔다. 그러나 그들이 타인의 시선을 피해 도망친 곳은 영원한 낙원이 되어줄 수 없었고, 학교의 킹카로 불리는 제이슨을 보며 피터의 마음속에는 불안함이 싹튼다. 인기 많은 남자친구, 모두가 좋아하는 남자친구, 그럼에도 자신의 남자친구라 떳떳하게 드러낼 수 없어 방에서만 사랑을 나누는 상황들이 한데 섞여 피터의 불만을 고조시킨 것이다. 이는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제이슨을 보며 피터 혼자 부르는 넘버 ‘Role of a lifetime’에서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오 주여 길을 좀 알려주세요. 거짓으로 살아야 하는 삶. 그걸 버텨내는 법. 두려움 속에서 항상 외로운 밤을 견뎌. 모든 게 다 꿈이길.’ 이처럼 피터는 거짓으로 꾸며낸 삶을 산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죄책감을 가지고 사는 인물이다. 오래전부터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 왔던 피터는 제이슨과의 관계를 커밍아웃하길 원하지만, 과연 제이슨도 그걸 바랐을까? 부자 아버지, 자신이 원하는 건 뭐든 지원해 주는 집안, 잘생기고 키 크고 운동도 잘해서 학교에서 킹카로 통 하는 스스로에게 과연 오점을 남기고 싶었을까? 넘버 ‘Best kept secret’을 통해 관객은 피터와 제이슨이 서로 다른 입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세상 어딘가 우릴 위한 공간이 있다는 걸 난 알아. 둘만의 시간. 간절히 원하는 그 시간. 하지만 현실은 잔인해. 날 가지려면 시간을 견뎌. 세상이 잠들기를 기다려줄래. 지워줄게 내가. 의심을 없애줄게. 둘만의 비밀. 우리 둘만의 비밀.”
“내가 원하는 건 너의 눈빛. 눈으로 괜찮다고 말해주면 편안해져. 밤에만 속삭이던 그 말들. 아침 햇살 받으며 듣고 싶어. 용기를 내보자. 괜찮을지 몰라. 별들 아래서만 허락된 너와 나. 더 이상은 우리 이렇게 숨지 말자. 둘만의 비밀. 이렇게 영원히 살 수는 없어.”
밝은 태양 아래 모두 앞에서 떳떳하게 연인과 서고 싶은 피터와 세상이 잠든 시간 자신들만의 낙원에서 사랑을 속삭이고 싶은 제이슨. 둘의 의견이 이토록이나 극명하게 달라지면서 이 들의 관계도 금이 가기 시작한다. 어쩌면 피터는 알았을지도 모른다. 제이슨이 그리는 미래엔 자신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제이슨이 원한 건 그저 지금 당장의 쾌락일 뿐, 자신들의 계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결국 제이슨은 피터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이별을 고한다. ‘네가 뭔데 내 탓을 해. 그만해. 규칙을 멋대로 바꾼 건 너야. 답답한 소리 이제 그만해. 이게 쉬워? 정말? 이 병신아. 집어치워 모두 전부. 현실을 똑바로 봐. 이건 해피엔딩이 아니야. 동화가 아닌 걸 몰라? 우리 같은 사랑은 비극으로 끝나게 돼있어.’ 피터는 알았을까. 윽박지르듯 피터를 밀치며 제이슨이 쏟아내던 분노들이 사실은 깊은 두려움에서 기인했다는 사실을. 아마 몰랐을 것이다. 떠나려던 피터를 붙잡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달라는 제이슨은 사실 피터보다도 훨씬 나약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극 중에서 제이슨은 가진 게 많은 사람이다. 가진 게 많은 사람은 잃을 것도 많고, 잃을 게 많기에 겁도 많다. 피터가 떠나버린 기숙사에 찾아온 아이비를 보며 제이슨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 어쩌면 피터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현실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일말의 기대 등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아이비와 잠자리를 하며 노래하는 제이슨은 성관계가 가져다 줄 쾌락에 대한 기대보다는 모든 걸 잊고 도망치고 싶은 처절함이 더 엿보인다. 아이비를 통해 피터를 잊을 수 있을 거라며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바보 같게도.
그리고 그 한 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제이슨에게는 더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몰아치게 된다. 아이비가 임신하고, 피터는 제이슨이 아이비와 잤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맷은 제이슨과 피터의 관계를 강제로 커밍아웃한다.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이 사건들은 제이슨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본인이 저지른 일에 대한 결과라 하더라도, 미성년이 짊어지기엔 무겁기만 하다. 친구들이 떠나고 홀로 남겨진 제이슨이 처음으로 무너지며 부르는 넘버 ‘Once Upon A Time’은 그래서 더 처절하다.
“아주 오래전 내가 처음 너의 손잡았을 때, 사랑 그건 죄가 아니었어. 날 완전하게 채우는 건 너였어. 잡고 싶지만 닿을 수도 없이 멀리 있는 너. 나 혼자 이곳에 울며 떨며 갇혀있어. 도와주소서, 주여. 지금 내 곁에 계시면 모든 죄를 씻어주소서. 붙잡아 주소서. 주 뜻대로 살지 못한 나 같은 죄인, 정말 사랑하실 수 있나. 아주 오래전 오직 원했던 하나, 너야. 알고 있었는데 이제 뭘 해야 할지 몰라 주께 기도하네.”
뒤늦게 피터에 대한 사랑이 너무도 컸음을 깨달은 제이슨은 자신의 선택을 되돌리려 하지만 이미 피터의 마음의 문은 굳게 닫혀버린 후다.
그런 말이 있다. 한 번도 실패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생애 첫 실패를 겪었을 때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져버리게 된다고. 타고난 조건들을 통해 우월한 입지를 다져온 제이슨은 그 한 번의 실패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다. 어쩌면 그 한 번이 사랑하는 피터와의 이별이었기에 견딜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 날 제이슨은 친구를 통해 다량의 마약을 건네받는다. 너무도 강력한 약이기에 한 번에 먹어선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는 말을 뒤로하고 제이슨을 약을 모조리 입에 털어 넣는다. 약기운에 용기를 얻었던 걸까. 제이슨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진심을 전하며 피터를 붙잡는다. 하지만 피터는 단호하게 관계의 끝을 고한다. ‘이제 문제 앞에서 너 없이 서 있는 나. 기도가 답이라면 무릎 꿇겠지. 우리는 늘 답을 찾을 수 없기에, 이제 그만 우리 둘 헤어지자. 잊지 않을게 우리 추억들을.’ 완전한 이별 앞에서 무너진 제이슨은 피터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둔다.
‘베어 더 뮤지컬’은 가톨릭계 기숙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작품 속에는 외모 지상주의, 섹스, 혼전 임신, 마약, 동성애 등 자극적인 소재들이 가득함에도 선정적인 면보다는 그 속에서 혼란을 겪고 방황하는 청춘들에게 더 포커스가 맞춰진다. 극이 시작한 그때부터 막이 끝날 때까지 정처 없이 흔들리는 감정들, 정답 없는 인생들, 그리고 비극으로 치닫는 이야기가 끝나면 관객들의 마음속에는 먹먹함과 이유 모를 안타까움만이 남아있다. 결국 제이슨은 세상을 떠났고 남겨진 이들은 죄책감 속에 남아있다. 그러면 관객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저 아직 정답을 모르는 아이들이었을 뿐인데 현실이 너무 가혹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극이 진행되는 내내 제이슨은 모든 것에서 회피하기 바빴지만, 사실 회피는 그에게 가장 절실하고 강력한 방어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런 제이슨을 이해하기엔 다른 아이들도 너무 어렸을 뿐. 그를 보듬어 줄 단 한 명의 어른만 있었더라도 비극은 피해갈 수 있지 않았을까.
극 중에서 힘들어하는 피터에게 샨텔 수녀님은 이렇게 말했다.
“피터 넌 틀린 게 아니야. 그냥 다른 것뿐이야. 하느님은 쓰레기를 만들지 않아. 답을 모두 아는 이는 이 세상에 없단다. 다른 이를 위해 자신으로부터 숨는다면 그건 엄청난 실수야.”
제이슨은 고해성사를 위해 신부님을 찾아가지만 그곳에서 마주한 건 차가운 현실이다. 눈을 보고 말해달라는 제이슨의 시선을 신부님은 필사적으로 피한다. 제발 괜찮다고 말해달라는 절규에도 끝끝내 ‘괜찮다’는 한마디를 건네지 않는다. 그저 이겨낼 수 있으니 버티라고, 둘만의 비밀로 해줄 테니 침묵을 지키라고 할 뿐. 이미 그 비밀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게 됐는데도. 신부님의 조언에 무너져 오열하는 제이슨을 보며 생각하게 된다. 만약 제이슨이 신부님이 아닌 샨텔 수녀님을 찾아갔다면 결말이 조금은 달랐을까? 인생에 만약이란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비극 앞에선 누구나 만약을 되짚게 되는 법이다. 제이슨이 조금 더 용기 냈다면, 피터가 제이슨의 두려움을 조금만 이해해 줬더라면, 맷이 강제적으로 커밍아웃하지 않았더라면, 친구가 제이슨의 요구에도 마약을 건네주지 않았다면, 신부님이 샨텔 수녀님처럼 제이슨을 이해하고 보듬어줬더라면 하는 가정들만이 끊임없이 남아 무대 위를 맴돈다. 그리고 그 모든 절실한 가정을 비웃듯 제이슨은 끝내 떠나버렸다. 모두에게 상처만 남긴 채.
극의 마지막 장면인 졸업식 날, 결국 제이슨의 자리엔 덩그러니 주인 잃은 졸업장만 남아있다. 그 빈자리를 보는 모두의 마음에도 지워지지 않는 상흔이 남았을 터다. 누군가에게는 그리움으로, 누군가에게는 죄책감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평생 털어낼 수 없는 성장통으로. 그리고 가장 많이 울었을 누군가에게는 낙인처럼 지워지지 않는 첫사랑으로.
가장 아름다웠을 청춘의 한 시기, 빛나던 사랑을 떠나보낸 피터는 때때로 휘청거릴지언정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제이슨에게 외면당하고 버림받아도 무너지지 않고 샨텔 수녀님에게 얻은 위로로 자신만의 정답을 찾아냈던 것처럼. 다만 살면서 한 번씩 제이슨이 떠오를 때마다 간절하게 바라지 않을까. 자신의 품 안에서 숨을 거둔 제이슨이 마지막 순간만큼은 편안했기를. 자신을 억누르고 옥죄던 억압과 편견들을 벗어던지고 그곳에서는 마침내 평안에 이르렀기를.
이승희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