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좋아하세요?] 신이 되려 했던 나약한 인간의 최후…뮤지컬 ‘프랑켄슈타인’
[뮤지컬, 좋아하세요?] 신이 되려 했던 나약한 인간의 최후…뮤지컬 ‘프랑켄슈타인’
  • 이승희 기자
  • 승인 2024.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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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EMK뮤지컬컴퍼니
사진=EMK뮤지컬컴퍼니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구약성서의 창세기에는 바벨탑에 관해 짧고도 매우 극적인 일화가 실려있다. 높고 거대한 탑을 쌓아 하늘에 닿으려 했던 인간들의 오만한 행동에 분노한 신은 본래 하나였던 언어를 여럿으로 분리하는 저주를 내렸다. 바벨탑 건설은 결국 혼돈 속에서 막을 내렸고, 탑을 세우고자 했던 인간들은 불신과 오해 속에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지고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는 이야기다. 신의 권위에 도전해 우왕좌왕하게 된 인간의 이야기. 그렇다면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한 인간이라면 어떨까. 그 이야기의 결말은 과연 어떻게 끝날까. 스스로 신이 되려 했던 인간의 이야기, 바로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이다.

뮤지컬은 영국 출신의 여성작가 메리 셸리 (Mary Shelley)의 소설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작품이다. 충무아트홀 개관 1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한국 창작 뮤지컬로, 올해로 10주년을 맞이한 역사 깊은 작품이기도 하다.

19세기 유럽, 나폴레옹 전쟁 당시 스위스 제네바 출신의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전쟁터에서 죽지 않는 군인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던 중 신체 접합술의 귀재 앙리 뒤프레를 만나게 된다. 빅터의 확고한 신념에 감명받은 앙리는 그의 실험에 동참하지만 종전으로 연구실은 폐쇄된다. 제네바로 돌아온 빅터와 앙리는 연구실을 프랑켄슈타인 성으로 옮겨 생명 창조 실험을 계속해 나가지만 예상치 못했던 사건을 맞닥뜨린다. 그들의 실험에 꼭 필요했던 재료, 바로 인간의 머리를 구하는 과정에서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앙리는 빅터를 살리고자 자신이 살인자라고 거짓 자백한다.

바로 이 순간부터 관객이 작품을 보는 시선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게 된다. 첫 번째는 빅터를 중심에 놓고 바라보는 시선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이 작품 전체적인 서사를 끌고 가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자 주인공이다. 실제로 빅터와 앙리의 첫 만남에서 빅터는 앙리의 목숨을 구한 바 있다. 앙리는 빅터가 아니었다면 전쟁터에서 즉결 처형을 당할 뻔한 인물로, 그에게 빅터는 생명의 은인이다. 그렇기에 은인을 살리려는 마음과 자신들의 실험을 완성하고 싶은 두 가지 마음에 앙리가 희생을 자처한 셈이다.

여기서 다시 관객은 의문을 품게 된다. 그렇다면 빅터는 왜 침묵하는가. 유일한 친구가 자신을 대신해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왜 빅터는 진실을 밝히지 못하고 숨어있을까. 빅터의 넘버 ‘나는 왜’에서 그는 “욕망이 눈을 멀게 해. 보이지 않아. 또 시작된 걸까. 누군가 나를 조종해. 야망에 굴복한 난 패배자. 나는 왜 돌이키지 못할까. 나는 왜 벗어나지 못할까. 나는 왜. 내가 왜. 위대한 망상에 저당 잡혀 울부짖나”라며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처형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간단하게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빅터가 어린 시절 겪었던 일들 때문이다.

빅터가 어릴 적 빅터의 어머니는 흑사병으로 죽고, 빅터는 어머니를 살려내겠단 일념으로 묘지에서 어머니의 시체를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에 마을에는 ‘시체가 돌아다닌다’며 빅터의 어머니가 마녀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두려움에 휩싸인 사람들은 급기야 빅터의 성에 불을 지르고, 빅터 남매를 구하려던 아버지는 불길에 휩싸여 죽고 만다. 이후 남매는 삼촌의 집에 맡겨지지만 불의의 사고가 발생하고 빅터에게는 저주받은 아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빅터는 결국 집사인 룽게만 데리고 유학길에 오른다. 이후 이어진 빅터의 삶은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이 목표였을 것이다. 자신이 저주받은 게 아님을 증명해야만 하는 삶. 실제로 극이 끝나갈 무렵 빅터는 유학길에 오르던 날로 돌아가 어린 줄리아에게 말한다. “너도 나처럼 저주받아. 내가 돌아오면 모두가 위험해져.” 그렇다. 그의 일평생은 주위 사람들이 찍은 낙인을 부정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삶이었던 것이다. 온 마을이 합심해 마녀사냥하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마저 잃어버린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생명 창조를 통해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오직 그것뿐이었을 터. 그렇기에 빅터는 자신의 유일한 친구 앙리가 죽을 수 있는 상황 앞에서 고민했다. 그것은 단순히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해서라기보다는 본인이 죽었을 경우 자신의 실험이 영원히 실패로 남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대로 된 어른 없이 혼자 자라야 했던 아이가 스스로를 증명해 내는 것에만 매달리게 될 때, 도덕심은 으레 그렇듯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결국 고민하던 빅터는 마지막 순간 앙리를 구하기로 결심하지만, 그 조그마한 양심 역시 큰 힘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앙리는 결국 처형당하고, 빅터는 단두대에서 잘린 앙리의 목을 가져와 새로운 생명을 창조한다. 그렇게 탄생한 피조물이 눈을 뜨며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이름조차 받지 못한 존재, 괴물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이 다른 극과 차별화된 점을 한 가지만 꼽으라고 한다면 1인 2역을 꼽을 수 있다. 모든 배우가 극 중에서 상반된 두 가지 캐릭터를 소화하기 때문이다. 1막에서 항상 빅터를 지지하고 응원하며 함께 실험에 몰두했던 앙리는 괴물로 탄생해 새로운 연기를 보여준다. 세상에 갓 태어나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에 대한 도덕적 관념조차도 없는 무지의 상태. 갓 태어난 괴물에게 자신의 수족과도 같았던 룽게를 잃고 빅터는 깨닫는다. 자신이 앙리를 되살렸다고 굳게 믿었지만, 사실 제 눈앞에 서 있는 것은 앙리가 아닌 정체 모를 괴물일 뿐이라는 사실을. 빅터는 괴물을 ‘처분’하기로 마음먹고 실행하지만 실패한다. 이유도 모른 채 태어나, 이유도 모른 채 죽임을 당할 뻔하고, 이유도 모른 채 빅터를 피해 도망친 괴물에게는 험난하고 끔찍한 인간들의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격투장에서 이용당하며 팔이 부러지고 다리가 꺾여도 죽지 못하는 삶. 유일하게 믿고 마음을 줬던 인간에게 배신당하는 삶. 그러한 삶들을 겪으며 괴물은 인간에게 분노하고 각성한다. 벼랑 끝까지 내몰린 괴물이 복수를 다짐하며 부르는 넘버 ‘난 괴물’은 세상에 태어난 이후 평생을 고통받아야 했던 괴물의 심정을 절절히 대변해 주는 노래로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을 대표하는 넘버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 혼자. 단 하나의 존재. 철 침대에서 태어난 나는 너희완 달라. 인간이 아냐. 그럼 나는 뭐라 불려야 하나.

나의 신이여. 말해 보소서. 대체 난 뭘 위해 만들었나. 단지 취미로. 호기심에 날 만들었나. 숨을 쉬는 나도 생명인데. 왜 난 혼자서 여기 울고 있나요. 여기 버려진 채로. 정녕 내겐 태어난 이유가 없나.

나의 창조주시여. 뭐라 말 좀 해봐요. 왜 난 모두에게 괴물이라 불려야 하나. 내게도 심장이 뛰는데. 이 슬픔을 참을 수 있는가.

피는 누군가의 피. 살은 누군가의 살. 나는 누군가의 피와 살로 태어났네.

나의 신이여. 나의 창조주시여. 내가 아팠던 만큼 당신께 돌려 드리리. 세상에 혼자가 된다는 절망 속에 빠트리리라.”

이후 앙리로서의 기억이 돌아온 괴물은 빅터의 이름을 부르며 자기 존재의 기원에 대해 깨닫는다. 그러나 기억이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괴물은 빅터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한다. 과거의 빅터는 알았을까. 자신이 만들어낸 존재가 앙리임에도 더는 앙리일 수 없음을. 빅터의 꿈속에 살고 싶다고 웃으며 단두대로 향하던 앙리가, 피 칠갑을 한 만신창이 괴물이 되어 “나 그 꿈속에 살 순 없었나”라고 말하며 우는 장면은 그래서 더 슬프다.

결국 이야기는 파국으로 치닫고 빅터에겐 비극만이 기다리고 있다. 자신을 사랑해 주던 사람들이 모두 괴물 손에 죽고, 하나 뿐인 누나는 앙리가 그랬던 것처럼 살인자로 몰려 단두대에서 처형당한다. 모든 비극이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다. 그럼에도 빅터는 무너지지 않는다. 살려내면 되니까. 누나도 앙리처럼 살려내면 된다고 생각했을 터다. 이 얼마나 오만하기 짝이 없는지. 모든 비극의 시초가 생명 창조였다는 것을 알면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려는 인간을 보며 관객은 답이 없는 질문에 빠진다.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붙잡고 싶을 만큼 간절한 순간에 다다랐을 때, 나는 과연 빅터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가.

생명 창조를 위한 기계마저 괴물 손에 파괴된 사실을 확인한 순간, 관객과 빅터는 함께 절망한다. 어쩌면 마지막 순간까지도 누나를 되살려낼 수 있다는 희망이 빅터에게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괴물에 의해 그 희망까지 산산조각이 나고 빅터는 오롯이 혼자가 된다. 하나뿐인 친구도, 집사도, 누나도, 사랑하는 여인까지 모두가 떠나버린 세상. 마지막 복수를 위해 괴물이 기다리고 있을 북극으로 향하며 빅터는 노래한다.

“얼마나 더 아플 수 있을까.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이 찢긴 가슴을 얼마나 찢어야 이 고통을 멈출 수 있을까.

돌이켜 보면 지난 세월들. 모두 내 이기적인 욕심뿐. 두 눈을 가리고 그림자처럼 내 야망을 쫓아왔네. 이제는 후회해도 되돌릴 수가 없어. 용서받지 못할 내 실수들.

신이 계신다면 들으소서. 나약했던 한 인간의 외로운 싸움을, 고독한 진실을, 발버둥치려 했던 나의 운명을.”

사진=EMK뮤지컬컴퍼니
사진=EMK뮤지컬컴퍼니

 

그리고 직감했을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마지막 싸움이 될 거라는 걸.

북극에서 괴물과 만난 빅터는 괴물을 죽이는 데 실패하고 다리에 총상을 입는다. 빅터는 죽음을 직감하지만 괴물은 도리어 빅터에게 총을 돌려준다. 망설임 없이 자신의 피조물을 없애기 위해 방아쇠를 당기는 창조주. 그 잔인한 신 앞에서 괴물은 고백한다. “그 한쪽 다리론 이 북극을 빠져나갈 수 없어. 주위를 둘러봐. 이제 혼자가 되는 거야. 혼자가 된다는 슬픔. 빅터. 친구야. 이해하겠어? 이게 나의 복수야.” 살아생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앙리의 모습으로. 빅터를 위해 죽었던 바로 그 앙리의 얼굴과 앙리의 목소리로 말이다. 빅터는 죽어버린 괴물을 짊어지고 북극을 빠져나가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메아리뿐. 혼자 북극에 남겨진 빅터에게는 절망만이 남았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나한테 왜 그래”라고 울부짖는 빅터는 결국 괴물이 그토록 바라던 대로 혼자가 되어버렸다. 그저 하늘을 동경하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었을 뿐인 어린아이는 홀로 남겨져 목도한다. 자신의 오만과 어리석음이 불러온 비극의 결말을. 그 처절한 결말 앞에서 관객은 숨 쉬는 법도 잊은 채 빨려 들어간다.

하지만 비극을 멈출 수 있는 순간은 분명 몇 번이고 있었다. 빅터가 조금만 덜 오만했다면, 되살아난 괴물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품어줬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라 생각하고 차근차근 알려줬더라면, 인간과 다른 모습을 한 괴물이 격투장에 붙잡혀가 이용당하지 않았다면, 괴물이 처음으로 마음을 줬던 여인 까뜨린느가 괴물을 배신하지 않았다면, 뒤늦게라도 빅터가 용서를 구했더라면. 그러나 그 모든 순간은 차근차근 비극을 향해 달려가는 복선으로 작용했고, 인간의 욕심으로 점철된 순간들은 극이 진행되는 내내 촘촘히 쌓여왔다. 예정된 비극 앞에 관객은 처절하게 부서진 한 남자의 삶을 맞닥뜨릴 뿐. 극은 끝나버렸고 관객은 빅터를 북극에 홀로 남겨둔 채 현실로 돌아왔다. 그의 마지막은 어땠을까. 많이 외롭고 처절했을까. 후회했을까. 혹은 지옥에서 만나게 될 괴물을, 자신의 친구 앙리를 그리며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였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저 그의 마지막이 조금은 덜 고통스러웠기를 바랄 뿐.

이승희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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