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에서 시작한 345kV계통전압 격상, 50년 스틸컷
양창준 前 한전 전력관리처장
분단 이후 우리나라의 전력계는 그야말로 초비상 사태 다. 1948년 북 측의 일방적인 전기 공급 중단으로 남한 의 전력 공급은 심각한 어려움 을 겪게 된다. 전기 사 용시 간 제한 등의 조치가 취해졌고 전차가 멈췄다. 가정에는 전등만 사 용하던 시절이었는데 그마저도 산업, 공공시 설이 쉴 때 2 ~ 3시간만 공급되어 밤늦게까지 공부해야 하는 학생들은 등유 램프를 사 용하면서 매연으로 콧구 멍이 까맣게 그을려지기도 했었다. 그리고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경제발전과 더불어 엄청 난 전력 수요 상승 률 을 보다. 특히 68년도에는 전력수 요가 Peak 수치 기준으로 38.7%까지 성장하는 세계적인 기록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래서 이에 맞춰 많은 발전소를 건설하고 이들 발전소들 을 연계시키는 전력 계통방식이 구성되었다. 전기저널 은 그 역사의 한복판에 서 있었던 양창준 前 한전 전력 관리처장을 만 나 그 수십년간의 이야기를 사업별로 지도에 송전선로를 그려가며 들 어보았다.
전국을 밝혀라 : 1차 345kV 송전설비 건설사업 1948년 단전 이전 남한의 상황은 먼저 우리나라 전력계통의 초창기 역사는 해방 이전 일제에 의해 지 어진 계통부터 알아야 합니다 . 1차 사업 이전의 송전선로는 일제에 의 해 만들어진 154kV 송전선로가 남북으로 뻗어있는 상태라고 보면 됩 니다 . 대부분이 북한지역에 있었고 압록강 지류의 수력발전에서 생산 된 전력이 평양변전소를 거쳐 서울로 내려왔지요. 48년 단전 당시 남 한에는 월화력, 당인리화력, 청평수력 등 241MW 용량의 발전설비 만 남아 그야 말로 가난만큼 전기사정도 열악했다고 보면 됩니다 .
1948년 단전 이전 남한의 상황은 먼저 우리나라 전력계통의 초창기 역사는 해방 이전 일제에 의해 지 어진 계통부터 알아야 합니다 .
1차 사업 이전의 송전선로는 일제에 의 해 만들어진 154kV 송전선로가 남북으로 뻗어있는 상태라고 보면 됩 니다 . 대부분이 북한지역에 있었고 압록강 지류의 수력발전에서 생산 된 전력이 평양변전소를 거쳐 서울로 내려왔지요. 48년 단전 당시 남 한에는 월화력, 당인리화력, 청평수력 등 241MW 용량의 발전설비 만 남아 그야 말로 가난만큼 전기사정도 열악했다고 보면 됩니다 .
1차 사업의 시행 배경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미국의 엔지니어링회사 CAI(Common wealth Associates Inc.) 란 회 사가 있어요. 공급 인프라 기반이 열악했던 당시, CAI를 통해 우리나 라의 전기 현황 분석과 개선차원의 컨설팅을 의뢰하게 됩니다. 그 결 과, 작성된 용역보고서1)에서 제시한 자료들을 설계기준, 자재 사양결 정 등에 적용했죠. 당시 6· 25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라 발전소는 대체로 남 해안 인근에 지어야 한다는 방침이 있었습니다 . 아무튼 그 방침대로 발 전소는 지어질 예정이었고 이에 맞춰서 송전설비를 남쪽에서 서울 쪽 으로 가져와야 했죠. 이에 따라 여수와 고리에서 만들어진 전기를 끌 어오는 신여수 송전선(여수-옥천 간), 신울산송전선(울산-옥천 간)과 옥천에서 모인 전기를 서울로 공급하는 서서울 송전선로가 건설됐습 니다(그림 1 참조) . 1차 사업 당시 변전소는 차관으로 도입되는 외자를 들여왔는데 모두 옥외형이었어요. 이 변전소를 설치하려면 380~400m를 한 변으로 하 는 정사각형 부지가 필요했습니다 . 당시만 해도 농업이 중심인 경제구
조라서, 일단 농사짓는 땅은 제외하자는 생각이 기 본적으로 깔려있었어요. 그래서 농지와 마을을 벗어난 교외 야산, 그것도 묘지가 적은 북쪽 산자락으로 부지를 선정했지요. 대략 6~7만 평의 땅을 매입하고 4만 평 크기의 부 지를 조성했는데, 부지 매입 당시 지역사회의 반발 은 거의 없었어요.
2회선 선로 강행, 정부의 협조, 건설의 어려움
사업 당시 2회선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당시 CAI측에서 2복도체 1회선 설치를 권고했으나 최종적으로 송전선로는 한전 초고압건설 팀장 등에 의해 2회선 선로로 결정했어요. 2복 도체라는 것은 전선 두가닥이 한개의 선이라고 보면 됩니다 . 원래 이 두가닥이 뭉친 하나의 선이 3개가 모여서 한 회선이 되는데 설명이 어려워 질 수 있으니 넘어가죠. 아무튼, 우리(한전)가 보기에는 2회선은 나중에 꼭 해야 할 것들이고, 당시 예상으로 곧 2회선 만 큼의 수요가 생길 것이란 판단에 설득력이 있었 지요. 그런데 CAI 권고에 더해 감사원과 여러 부 처에서 과잉투자, 사전투자가 아니냐는 지적 등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았어요. 그래서 지금 1회 선을 짓는 것 보다는 미리 2회선으로 짓자고 여 러 부처를 설득하는데 우리 사람들이 참 애를 먹 었지요. 우리나라의 전력 수요는 70년대 80년대 지나면서 세계 기록 수준으로 증가했어요. 그때 2회선을 강 행하기 아주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 나중에 이 야기 하겠지만 결국 전력 수요가 급증해서 2복도 체도 부족해서 4복도체, 그러니까 한 줄에 전선 네가닥이 가는 것으로 바꿔야 했거든요.
당시 그렇게 앞날을 내다본 결정들이 또 있었는지 저는 변전소 모선 구성방식과 보호계전방식을 들고 싶어요. 변전소 모선 방식을 2중 모선 1.5차 단기 방식으로 하고 보호계전방식으로 2계열 주 보호 방식과 2계열 후비보호 방식을 채택했죠. 당초 CAI가 권고한 것인데 이것들은 당시 독일, 국에서도 채택하지 못한 고신뢰도의 설비거 든요? 제가 70년대 초 외국에서 연수를 받으면서 각국의 엔지니어들을 만날 기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아주 부러워했었죠. 물론, 예산이 많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당시 정부 에서도 계통전압 격상 사업에 있어서는 한전이 요구하는 예산을 거의 삭감하지 않았어요. 원할 한 사업추진에 큰 힘이 되었지요.
하지만, 당시 건설 설비들이 부족한 환경이었을텐데 애로사항이 있었다면 애로사항의 수준이 아닙니다 . 참 많은 사람들이 고생했어요. 그 고생 을 다시 생각하면 내가 이 사업에 대한 대변할 자격이 있나 모르겠네 요. 1차 사업의 송전선로(신여수, 신울산, 서서울)는 여수/호남 화력발 전, 고리 원자력발전이 준공단계에 있어서 착공 때부터 밤을 새우는 작업이 많았습니다 . 철탑을 예로 들면, 1차 사업때 철탑 1527기를 세워야 하는데 1기당 50 톤 정도의 자재가 투입됩니다 . 그런데 철탑은 대부분 산에 그리고 사 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곳에 설치됩니다 . 당시 이 자재들은 목도꾼이라 고 해서 어깨, 무릎에 마대자루로 된 보호대를 두른 순수인력으로 운 반해야 했어요. 당시 헬기, 차량, 인력 세가지가 검토되었는데 헬기는 일단 비싼데다 부족했고, 차량은 진입도로를 만들어야 했고 비경제 적이란 판단 끝에 인력으로 추진 된 것입니다 . 많은 사람들이 말도 못 할 고생을 겪었습니다 . 더욱이 결선작업 같은 경우에는 기술이 있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데, 인력이 부족했었어요. 밤새워 가면서 작업을 하는데 야간에는 관 리 쪽 사람들이 타는 지프차의 헤드라이트를 켜놓고 작업을 했습니다 . 이 사람들이 엄청나게 고생했어요. 진짜 이 분들이 애국자인데…
더 단단해진 송전망 : 2차 송전설비 건설사업 이어진 2차 사업에 대해서 설명해 주신다면
2차 사업은 계통도상에서 큰 변화는 안 보입니다 . 이게(2차 사업이) 기존 선로의 용량을 더 키우고, 대도시로 가는 송전선을 짓는 사업이었거 든요. 그래서 먼저 서울을 보면 기존에 서서울로 가는 선을 지금의 경기 도 광명에 있는 서 변전소와 하남에 있는 동서울변전소가 추가로 생 겼고 서대구 , 북부산 변전소와 관련 송전선도 건설되었죠 (그림 2 참조) . 2차 사업은 앞서 이야기 한 것 처럼 네 가닥이 한 줄이 되는 4복도체를 도입해야 했었어요. 아마 다니다가 자주 봤을 텐데, 네 가닥이니까 서 로 엉키지 않게 사각형 모양의 스페이서(SPACER) 금구류 각모서리에 각도체를 붙잡아 고정시켜서 한 줄(1상)로 만들죠. 765kV 송전선에는 6각 모양의 스페이서를 취부하는 6도체로 1상을 만들어 사용합니다 . 서울의 경우에는 기존의 서서울에서 바로 연결되는 동서울, 서 변전 소 두 곳을 더 세우면서 세 곳으로 나누어 공급하게 되었죠. 2 차 사업 때는 외자 비율이 많이 줄었어요. 일단 변전소에 주변압기, 차단기가 가장 중요했고 비용도 나가는데 이걸 국산화 했기 때문입니 다 . 아무튼 건설 자재는 일본 차관으로 애자(碍子 , insulator)와 금구류 만 외자로 도입했어요. 변전 기자재는 국 차관으로 국제품을 사용 했죠. 기록을 찾아보니 외자비율이 1차 33%에서 14%로 대폭 줄어들 었더군요.
환상 연결망의 시작, 3차 송전설비 건설사업 3차 사업에는 지도상에서도 변화가 많이 보입니다 어떻게 보면 현재 전력망의 기초가 3차 사업이지 싶습니다 . 3차 사업에 서는 9개 변전소를 환상(Closed-Loop)으로 연결했어요. 고리가 세개 붙어있으면 한 곳이 고장이 나도 다른 경로를 통해서 전기를 보낼 수 있 잖아요? 그런 원리를 이용한 겁니다 . 먼저 경인 지역에 동서울-서-서서울이 있었죠? 이 세곳이 서울 남쪽 으로 연결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서울 북쪽으로 신양주-의정부-동서 울을 거쳐 연결하고 인천화력(현 서인천, 신인천)에서 오는 전기까지 연결했죠. 이렇게 서울을 둘러싼 하나의 써클(환상망)이 생겼습니다 . 이같은 환상망은 발전소에서 시작하면 이해하기 편합니다 . 서쪽부터 먼저 보면 지금 한빛원전인 광원전(전남)에서는 광주와 청양으로 퍼 지고 청양은 다시 서서울과 연결됩니다 . 광주에서는 1차 사업때 있었 던 여수-옥천간 송전선에 연결되어서 여수-남원-옥천-청양-광원전광주-남원을 잇는 또 하나의 1개 고리가 생기죠. 이런 식으로 동쪽에 있는 월성원전은 신포항-신주-신제천을 거쳐서 동서울로 들어가고, 이 둘 사이에 신울산-북부산-마산-서대구 루프에 남원-마산-북부산도 이어지고… 지도를 보면 한 곳이 끊어지더라도 갈 수 있는 방법이 많아지죠(그림 3 참조). 이 같은 1차 환상이 준공된 1988년, 경상북도 주에 있는 신주 변전소에서 준공식을 크게 열었 어요. 이게 어느 정도로 중요성을 지니냐면 일단 이론상 전정전(Total Black-Out)이라는 것을 막을 수 있어요. 고장이 생겨도 다른 경로를 이용하면 됩니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에 정전 염려를 크게 줄일 수 있게 되면서 전력 계통에 있어 아주 큰 의 미가 있는 겁니다 . 가까운 일본과 비교하면 일본 도 계통이 튼튼한 편인데 동경은 동경만을 둘러 싸는 3중으로 루프를 만들었어요. 이게 세계적으 로 인정받아온 체계인데 우리도 그에 못지 않는 세 계적 수준의 안전한 계통을 갖추게 된 셈입니다 .
운설비도 계통만큼이나 많이 발전했어요. SCADA 라고 해서 원방감시제어 시스템이라고 하는데, 81 년 서울전력관리처와 전국 8개 전력관리처에 설치 했죠. 그리고 88년에 한전 본사에 EMS도 설치해서 지역의 SCADA와 연결했고 자동발전제어, 경제급 전, 자동주파수제어가 가능해졌습니다 . 그리고 무엇보다 3차 사업부터는 재원을 내자로 조 달하게 되었어요. 옥외 GIS라는 것이 개발되어 변전 소 부지를 2/3 크기로 대폭 줄죠. 이때부터는 사람 들이 지방과 소도시들도 많이 발전해서 과거와 달리 변전소와 철탑 부지선정에 애를 먹었고, 이에 따라 지역의 협조는 물론, 대관인허가도 많이 어려웠죠
급증된 전력수요에 대해서 전력 수요 급증에 대해서 설명해 주신다면 제가 과거에 논문을 쓴 적이 있어요. 그 논문에 전 력 수요 증가세를 다뤘는데 1,2,3차 사업이 진행될 당시의 전력 수요를 집계한 수치가 있습니다 . 그 당 시의 성장세는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수치더 라구요. 사업 당시에도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했었죠(그림 4 참조). 그 때에 2회선을 강행한 1차사업이나, 4복도체로 수요급증에 한발 앞서 대응한 2차 사업이나, 환상 연결망을 만든 3차 사업을 돌이켜 보면, 근거자료 도 부족했을 텐데 어찌 예상하고 다 만들었나 신기 하기도 하고 쑥스럽지만 자랑스럽기도 하네요. 전력 수요는 90년때까지 급증한 것에 반해 2013~ 2015년 사이에 연평균 1% 정도로 수요가 줄어들었 는데 유럽 선진국들처럼 0% 시대에 들어설 것 같 아요. 국과 같이 마이너스 수요가 발생할 수도 있어요(2001~2009년 사이에 독일: 0.18%, 프랑스: 0.92%, 국: -0.23%, 이탈리아: 0.5%).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의 발전소 건설은 노후발전기를 교체하 는 정도로, 그것도 분산 전원으로 건설되는 신재생 에너지 전원으로 교체될 전망입니다 . 이에 따라 전
력계통의 확충도 많이 축소될 것이고, 결국 운, 유지, 보수 등이 주 업무가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
인터뷰를 마치며 전력계에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345kV 3차 사업 이후로도 전력계통망은 더욱 확장되어 345kV 60개 소와 연계 송전선로가 추가 건설되고, 765kV 송전선로도 5개 루트가 건설되면서 전력계통망이 촘촘하게 구성되었습니다 . 사실상 계통상 전정전(Total Black-Out)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된 것 같아요. 언젠가 모처에서 강의를 받을 때 계통에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 은 적이 있는데 그 자리에서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나중에 민 원성 이메일을 넣었지요(웃음). 지난 2011년에 있던 9.15 순환정전을 두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계통의 문제가 아니었잖아요. 순간적으로 과부하가 걸린 고장이 아 닌 인위적 부하제한이었습니다 . 그런데 이게 우리가 몇십년간 어렵게 만들어온 계통까지 문제를 삼을 때는 참 속상해요. 제가 알기로는 전 정전이라 할만 한 것을 찾아보니 1971년 9월 27일 서울화력5호기(발 전용량 230MW) 고장으로 인해 한 차례 발생한적이 있었습니다 . 이 때는 전력계통이 구성되기전이어서 오점을 남겼습니다 .
양 전 처장은 수십년에 걸친 안정적인 계통망을 구축해온 과거와 세 계 최고 수 준의 품질 좋은 전기를 공급하는 현실을 과거의 동료들과 함께해왔다는 자부심을 드러내며 앞으로도 이런 추세가 지속되기를 바란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며 인터뷰를 마무리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