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프로젝트가 진행될 때에는 혼자서도 할 수 없지만 한번에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직구성이 변하고 사람이 바뀐다. 그때 우리가 의지해야할 것은 그간 남겨놨던 기록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은퇴 후 감리단장으로 아직 현장에 있는 이석규 전 소장은 그 기록의 가치를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인터뷰 내내 제시된 자료들은 그가 업무에 어찌 임해 왔는지를 보여준 자리였다.
많은 사람들이 의심했던 세계최초 2회선765kV 송전, 그 큰 프로젝트를 대하던 당시그 현장의 기록들을 살펴보았다.
765kV를 시작하다
765kV를 시작하다 교육하지만 당시 공릉동에 있765kV는 아시다시피 난관이 많았어요. 이것이 정말 우리나라에 필요한 것인지 의심반 걱정반이었고, 지원도 충분하지 못한 상황이었죠. 당시 송전은 발전소를 지으면 그냥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어요. 게다가 765kV 송전부문 개발이 어렵게 진행됐지만, 시공사는 처음 접하는 것이다보니 기술도 경험도 부족했죠. 송변전에서 건설부문은 기초, 토목이 중요한데, 이전까지는 발전소 건설에 비해 규모가 작다보니 송변전 건설 인력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어려웠어요. 감독, 감리 부문도 마찬가지였고요. 이 같은 점 때문에 사업 초기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765kV 송변전 역사를 잠깐 되짚어보면 인력은 1978~1979년도에 양성되었어요. 그런데 1980년대들어서면서 발전소 이용률이 낮아졌고, 이런 기류에 따라 765kV 건설의 필요성이 다소 떨어졌었죠.
그런데 1990년대가 되니까 이게 정말 필요해진 거예요(전기저널, 473호(2016.5), 아! 그때 그사람 -김정부 박사 편 <765kV 송전기술 개발, 그때를 다시 회상하며> 참조). 1992년도에 765kV 송변전을 본격적으로 하기 위한 격상추진반이 만들어지면서 탄력을 받게됩니다.
이 사업을 위해 기준을 만들고, 인력을 어떻게 배치하고 조직을 운영할지 본사에서 준비를 했죠. 그리고 1993년도에 본사 지침이 내려와서 이를 시행하는 송변전건설처가 신설되고 실제 설계, 경과지 선정 등의 업무가 체계적으로 진행 되었죠.
저는 한전에 입사하고 공군에서 시설장교로 근무한 후 전역하면서 송전부로 복직했어요. 그때는 154kV, 365kV 업무 경험들을 쌓았죠. 그리고 창원전력관리처 송전부장을 지내다 당시 1992년 6월부터 1993년 6월까지 고급간부를 대상으로 하는 서울대 경영대학과 함께 진행되었던 한전경영대학원 과정에서 1년간 교육을 받았어요.
지금은 서울대에서 765kV를 시작하다 교육하지만 당시 공릉동에 있는 연수원에서 받았어요. 그때 25명의 서울대 교수님들이 교육을 해주셨는데 혼신을 다해 아주 꼼꼼하고 자세한 강의를 진행해주셨어요. 덕분에 지금 이 논문을 쓰게 되었죠(그림1 참조).
윤석철교수 처럼
윤석철 교수님이라고 아실는지 모르겠는데 그 분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당시 연수 때 제 지도교수님이기도 해요. 늘 우리나라의 발전을 고민하셨던 분이예요. 라인강의 기적을 보고 독일 처럼 한국을 발전시켜야겠다고 독일어를 공부했다가, 과학과 기술 개발이 우선이라고 생각해서 물리, 전자공학을 공부하시고 경영학까지 공부하신 분입니다. 이 분이 밥먹는 시간도 아깝고, 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셨어요. 너무 공부와 연구에만 몰두하다보니 위장병을 달고 살고… 이런 삶의 행보에 참 감명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저도 이런 삶까지는 아니더라도 한번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죠.
그래서 송변전에 대해서 세세한 역사를 다 찾아보면서 시작때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전압부터 인력관계, 일본과의 수준차이 등을 모두 담아보려고 했죠. 그런데 지도교수님은 이를 두고 무리라고 하시더라고. 이 방대한 것을 쓰기만하면 좋은데, 완성이 너무 어렵다는 충고였어요.
그런데 말이죠, 연수때 보면 말이죠, 간혹 목숨 걸듯 공부하고 일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연구실이나 자료실에서 몇달을 먹고자고 연구에 몰두하는 거죠. 인사분야를 다뤘던 선배 한분은 집에도 못가고 인사기록카드와 씨름하며 각 부서의 사람들 이름부터 경력들을 다 꿰고 앞으로의 인사전략을 내놓더라구요. 이런 사람들도 있으니 나도 한 번 해봐야겠다는 결심이 자연스레 다져 지더군요.
논문으로 돌아오면, 한전은 어디까지나 회사다 보니까 업무에 대한 변화 이력을 남기기가 힘들어요. 사무실 옮기거나 시간이 지나면 자료를 파기하니 자료가 안남더라구요. 여기에서 문제의식을 느꼈어요.
이런 기록과 기준을 지금이야 전기협회가 있으니까 괜찮은데, 당시에는 어려웠지요. 만약 설계가 바뀌었다면 어떻게 바뀌고 왜 바뀌었는지? 이 분야에 대한 아주 자세한 역사를 썼던거죠. 물론, 당시에는 제가 765kV 건설을 담당할 줄 몰랐는데 운명처럼 사업 추진과정에서 상당히 큰 도움이 되었어요.
그 이후로도 일을하다가 그 엄청난 노력을 하신 분들을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잡곤 해요. 윤석철 교수님 책은 여러 권이 있는데 <삶의 정도> 란 책이 제게 많이 도움이 되었어요.
송변전건설처로 발령이 나다
이렇게 연수를 다녀오고 나니까 송변전건설처 송전부장으로 인사 명령이 나더라구요. 업무는 물론이고 공부한 것도 있고 공군시설장교 복무 경력도 있다보니. 765kV 사업이 책상에 떨어져있더라구요. 일단 규모면에서 선뜻 진행할 엄두가 나지 않더군요. 지금 하고 있는 일만으로도 너무 벅찼는데 340km 규모의 어마어마한 사업추진이 떨어진 거죠. 그래서 이것은 좀 아니란 판단에 알아보니 양수발전소를 만들면 처를 하나 만들어서 50명 규모의 조직이 생겨나고 계획이 수립되는데 송변전 부문은 당연히 따라오는 부가적인 정도란 생각에서인지… 그 당시는 765kV사업의 개념이나 규모가 제대로 공유되지 않았던 시기였어요.
그래서 이제 연수원에서 배워오기도 했겠다, 특단의 조치를 취해보기로 했었죠. 그런데 이때 문민정부 초기에 엔지니어링 기본법이 확 풀어져버렸어요. 과거에는 단계별로 일정 경험이 있어야 다음 프로젝트를 할 수 있었는데, 면허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게 바뀐거죠. 적어도 365kV 송변전 경험이 있는 업체와 같이 일을 해야되는데 추진여건이 마땅치 않았어요. 그결과 찾아 낸 것이 당시 기준이 엄격했던 환경영향평가를 이용해보기로 했죠. 경과지 선정부터 측량, 설계에 환경영향평가까지 묶어서 이를 수행해 낼 수 있는 기업에게 주기로 한거죠. 이렇게 하면 적어도 수행가능한 대기업 수준의 업체가 들어오리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당시 대우니 삼환이니 하는 대기업들이 왔는데, 각각 장점이 다 다르더라구요. 예를들어 대우 같은 경우에는 송전선로 측량, 설계경험은 없는데 환경부문은 잘아는 상태였죠. 이에 따라 대우에 일을 주는 대신에 하도급은 송전선로 경험이 있는 회사에게 주어야 하는 단서조항을 다는 식으로 일을 진행했습니다. 실질적으로 일들이 아주 명쾌하게 마무리 되어나갔어요. 그때 그저 법과 규정들을 맹목적으로 쫓기만 했었으면 아마 어렵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765kV 리더십 1 – 실패의 여지가 없이 꼭 해내야 하는 사업
국가주요사업으로 765kV는 꼭 해내야하는 사업이었어요. 되고 안되고 그런 여지가 없었죠. 그런데 이런 큰 사업을 하는데 있어 법과 규정에 얽매여서는 안된다고 봤어요. 그렇게 되면 법이나 규정 탓을 하면서 못한다는 이야기가 쏟아져 나와버리거든요. 이렇게 되면 그 큰 사업을 그르칠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직원들에게도 강조한 것이 있어요. 우리는 765kV 송전선로라는 새로운 대동맥을 만드는 것이고 이것이 안되면 지금 건설 중인 당진, 울진 발전소가 준공이 되어도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강조했어요. 그렇잖아요. 석탄 발전을 보면 호주에서 석탄이 와도 송전이 안되면 석탄을 쌓아둘 곳도 없고, 국제 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악재들이 쌓여서 엄청난 손실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고 했죠.
그리고 또 한가지는 이 사업에 있어서는 우리가 실무자이고 최고 전문가이니 국민들 앞에 떳떳하게 제대로 하자는 거였어요. 한 예로, 과장 등이 결재를 못받아오면서 “이부분은 줄이라는데요? 하지말라는데요?”하고 보고하면 제가 다시 물어봤어요. “상사는 물어보고 반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근거를 대고 설득하고, 그래도 안되면 무슨 이유인지 정확하게 알아와 달라”고 했죠. 결정은 위에서 하지만, 일은 우리가 하니까 우리 의도를 충분히 설명하고 결정을 하도록 이끌어 내야한다는 점을 강조했어요.
왜 흔히들 ‘저 사람은 엄청 깐깐하다니까…’ 하면서 남탓하고, 제도나 규정 탓하면서 업무를 제대로 추진 못하는 사람들은 배제했어요. 그건 본인이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고 준비도 제대로 안된 것으로 봤습니다. 조건도 열악하지만, 그런 난관을 뚫고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자세가 필요했고, 무엇보다 이 사업은 꼭 해야만 하는 프로젝트였어요.
765kV 리더십 2 – 모두가 함께하는 사업
대신에 이런 역량이 있어도 지식이나 자료가 부족하면 파견도 보내고 연수도 보내고 제대로 일을 해낼 수 있게 교육을 많이 시켰어요. 리더는 지식과 경험으로 존경을 받아야한다고 봅니다. 부단히 노력해야하고 만약 부족하다면 지혜를 발휘하고, 내가 부족한 부분은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배우고 존중해야한다고 봐요.
아까 말한 것처럼 이 사업은 사명감을 가지고 열악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꼭 해내야 하는 사업이었어요. 그래서 규정, 미흡한 준비 등으로 이런저런 핑계로 안되겠다는 말이 나오는 것을 원천봉쇄했습니다. 철저한 준비를 하고 설득을 하고 그 준비가 정말로 잘못되었다면 지적을 감사히 받고 효율적인 대안을 내놓아야지요. 그래서 능력도 능력이지만 책임의식을 거듭 강조했었어요. 안그래도 765kV 건설처를 발족하려던게 1993년 문민정부 당시 기구축소 방침에 따라 1조 원이 넘는 사업을 부득이 765kV 추진부로 추진했으니 비상한 각오를 다져야 했죠.
그때 당시 부원 중 한 과장이 우리가 이 난관을 해쳐나가야하니 결의를 다지기 위해 패를 만들자고 제안했어요. 그때 부원 모두의 이름을 넣었죠. 이때 책임자, 관리자급 직원의 이름만 넣은게 아니라 말단 직원들 이름까지 다 넣었어요. 우리가 일을 하는데 누구하나 중요하지 않을 사람이 없었거든요(그림2 참조).
물론 그때 고생하는 직원들 어떻게 더 챙겨줘야하는 고민끝에 모든 경조사를 챙겼습니다. 참 그 때 생각하면 다들 많이 고생했어요. 저야 교육도 받고 연수도 다녀오고 그랬지만 그 친구들은 어찌보면 저 하나 믿고 따라온 거 잖아요.
우연이었을까? 인터뷰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이석규 전 소장으로 부터 장문의 문자 메시지가 왔다. 당시 근무했던 이주란 과장으로 부터 메시지가 왔다는 것이고 그 내용을 그대로 전해줬다. 아주 긴 내용을 보냈으나 지면상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무실에서 하루라도 공정을 단축해야 태백준령 1천미터 높이에서 겨울 칼바람 맞으며 매달려 일하실 작업자들이 하루 더 쉴 수 있다 하셨죠. 765kV 사업은 모두를 가족같이 대하고 회의적인 상부를 설득하며 부원들을 독려해 만든 부장님이 역사입니다. 제가 기념 동판에 이름이 올라간 것이 영광입니다. …(중략)…
예산군청 전특서류(?) 제출때 엄청난 양의 자료보완이 요구된 것도 생각나네요. 그 요구사항을 받아서 을지로 사무실에서 밤을 지새우고, 다음날 예산군청 담당 공무원과 아침에 같이 출근했을 때 일주일이 넘을 것이라 예상한 자료가 다음날 아침에 돌아와서 일처리 속도보다 열정에 놀라 자빠졌다죠. 이 사례가 아직도 공무원 교육에서 열정의 사례로 거론되고 있다고 합니다.”
송전선로의 최대의 난관 ‘민원’
그 당시 참 어려운 일들은 그 뿐만이 아니었죠. 특히나 송전선로 건설은 민원이 큰 변수잖아요. 처음에는 관례대로 업체선정 후 업체와 함께 진행 하려고 했는데, 엄청나게 중요한 사업이다 보니 업체보다는 사업주체인 한전이 나서야 겠다는 생각으로 전환했어요.
용지과를 우선 3개과로 10공구 10팀으로 팀당 용지원에 송전직원을 지원해서 현장안내, 기술사항 설명에 도움을 주었죠. 하나하나 만나 자세히 설명하고 대충하는 것 없이 제대로 마치려는 목적이었지요. 왜냐하면 용지가 확보되어야 철탑을 설계하고 제작할 수 있는데 적합한 용지가 없으면 안되잖아요. 그래서 관례보다는 주도적으로 먼저 용지를 확보하는데 공을 들였죠. 규정에 얽메이지 않고 그때 그때 합리적인 방안으로 설득하면서 진행했죠.
경과지 선정때도 체계적으로 직원교육을 시켰고, 업체와 경과지 선정, 환경영향평가 등 지속적인 지도 독려 설계에 하자가 없도록 참 부던히 뛰어다니고 노력했던 생각이 나요. 민원을 사전에 예방해야하니 송변전 용지 관련 실무 책임자들이 현장답사도 부지런히 다녔지요.
착공 당시 떠오르는 에피소드를 소개한다면 태백, 정선 쪽에서는 스키장, 콘도 등 관광단지 계획이 발표되면서 난항에 부딪혔어요. 부득이 태백은 경과지중 별도로 승인을 받아 시행했는데, 그때 건설소 간부나 직원이 고생 많이 했지요. 산중 철탑현장에 농성하던 군중에게 담당 부장이 억류되기도 했었고, 주민들이 가장 걱정했던 전자파 장해에 대해서는 김정부, 이동일 박사 등 전문가를 여러번 초빙해서 주민설명회를 여는 등 성의를 다했었죠.
모이고, 의논하고, 기록을 남겨라
제가 아까 보여드린 논문(그림 1)이 변천사다 보니 설계기준, 인력구성부터 공사기간, 사업비 같은 것들이 765kV 까지 많이 들어가 있어요. 당시에는 학술지에 내고 발표도 하자는 소리도 있었는데 그건 좀 부끄러운 일 같아서 안하다가 우연히 전기학회에 게재냈었는데 호응이 좋더라구요(웃음). 얼마 전에도 공사협회 임원으로 계시는 지인에게 드렸는데 필요한 내용이 많아서 본인이 몇부 더 제작해서 다른 사람 보여줘도 되겠냐고 묻더라고요.
그런데 이게 참 아쉽기도 한 게 독일, 일본에서 보고 느낀게 있어요. 특히 일본같은 경우 정부 관련 부처 해당 공무원, 9개 전력회사, 전선, 철탑회사, 시공사까지 30~40명씩 그룹을 지어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해외시찰을 다녀오면 자료집을 내고 그러더라구요.
이 같은 점이 고려되어 퇴직 후, 대한전기협회에서 송변전백서를 만드는데 참여했고 결과물을 한전에 제출하기도 했어요. 매년 이를 정리하는 일본의 환경이 부러웠어요. 우리나라의 경우, 원자력 분야는 하는데 송변전 분야는 그렇지 못해 안타까웠지요. 그래서 765kV 사업이라도 세세한 추진 과정과 얽힌 사건들, 회의 내용, 시찰다녀온 자료들을 모두 담았어요. 무조건 자료 받으면 한전 자료실에 내고 나머지는 각자 보유하자는 마음으로 지침을 만들었죠.
혁신을 추구하며, 행운도 만나다!
공사설계용역을 KOPEC(현 한국전력기술, KEPCO E&C)에 준 것도 당시로서는 꽤나 혁신적인 일이었어요. 이전까지 송변전에서 큰 사업의 용역을 준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미국이나 캐나다 등 이미 경험이 있는 나라를 돌아본 후, 오히려 이 어마어마한 규모의 사업설계를 제대로 해낼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더군요. 그래서 토목 전문가만 200명이 넘는 KOPEC에 수의계약으로 의뢰를 했죠. 전세계를 돌아다녀도 좋으니 최고의 설계와 자료집을 만들라고 했죠.
그 과정에서 한가지 호재가 있었어요. 당시 우리(한전)가 동경전력에 가면 문전박대를 당했었어요. 사무실은 일체 구경도 안시켜주고 회의실에서 잠깐 만나주는 정도였지요. 그래서 자료를 얻어올 수가있나. 그런데 때마침 KOPEC이 동경전력 자회사인 동전설계(동경전력설계(주))와 당시 기술교류 협정을 맺었더라구요. 아! 됐다 하고, 이를 통해 송전 토목 80억 원의 용역비 중 동전설계에 비용을 어느정도 지불하고 설계자문을받았던 행운을 누렸지요.
한 번은 그분들이 한국의 기술이 부족하니 견학을 추천하길래 토목, 전기 부문을 전후반기 2회에 걸쳐서 다녀왔죠. 현장이 어떠한지, 가설하려면 어떻게 해야하고…등등, 그 때 일본 사람들이 자료를 엄청 내줬어요. 같이 다니면서 기차도 타고 버스도 타고 저녁엔 맥주도 한잔하면서 상당한 분량의 내용들을 제공해 줬어요. 그때는 정말 그 사람들이 참 고마웠어요. 덕분에 미리 가공해서 철탑에 붙이는 Pre-Facrication 공법도 적용할 수 있었지요. 이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준공기념석에도 그때 도움을 주었던 동경전력설계 직원들의 이름을 넣었던 기억이 납니다.
765kV 사업, 무보수(무고장) 개념을 도입하다
이런 중요한 사업에 이렇게 든든한 바탕들이 있었기 때문에 765kV 송전선로 적기 준공에 ‘무보수(정비를 안해도 될 정도로 제대로 건설하자)’ 개념이 도입 될 수 있었어요. 765kV 는 최고전압이고 간선계통 선로라 고장이 나면 다른 선로의 고장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다른 선로를 통해서 공급한다고 해도 전압차가 2배 이상이라 불안정한 상황이 발생합니다. 고장이 빈번해지면 전력계통 운용에도 막대한 지장이 생기고. 시공 전에 특기시방서, 공법서, 시공품질점표 등을 만들어 공정 단계별로 시공사에서 철저하게 점검을 하게한 후, 감리 검측으로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게 했고, 이와 같은 내용을 전체 현장종사자에게 교육을 시켰죠. 이 것이 고장이 거의 없는 송전선로를 건설하겠다는 무보수 개념의 시공이예요. 그래서 전기공사 최초로 책임감리를 시행했어요. 당시 전기사업법에는 없었는데, 공기부족의 부실을 방지하려고 책임 감리를 시행했죠. 그게 아마 1996년도였을 거예요. 그리고 1997년에는 법으로 제정되어서 책임감리를 의무적으로 하게 되었죠.
동북아 전력망 구성 등에도 기여하길
이렇게 돌아보고 나니 765kV 추진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지금 고속도로 등을 다니면서 그 철탑들을 보면 20년전에 어떻게 만들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당시 1995년 3월 전원개발 사업승인을 얻기까지 적은 인원으로 해낸 데다가 일본 기술진도 반신반의 했었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큽니다. 정말이지 이 사업에 함께 일한 부원(팀원)은 물론이고 건설에 참여하고 도움을 준 국내외 여러들께도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 싶어요.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향후 동북아 전력망 구성부터 해외건설기술 수출에도 많은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